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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속의 버젓한 삶」(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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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장마 뒤끝에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28일 낮 대구지방의 기온은 37.8도. 올들어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낮의 더위는 그렇다치고 밤이 되어도 더위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른바 열대야라는 고온현상이 연일 밤잠을 설치게 한다. 물론 여기에는 바르셀로나에서 몰고 오는 금메달의 열풍까지 가세하고 있다.
이같은 불볕더위속에서도 정븐 에너지절약운동의 일환으로 관청과 국영기업체 등에 에어컨 가동을 일체 중지시켰다. 그래서 노타이 차림의 공무원들이나 국영기업체 직원들이 부채질하느라 거의 일손을 놓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멀쩡한 문명의 이기를 눈앞에 두고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여름에 에어컨 틀고,겨울에 난방을 돌린게 얼마나 된다고 벌써 이 야단들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더구나 아직도 많은 서민들은 선풍기바람이 고작인데 말이다.
그런 뜻에서 한 선학이 남기고 간 글을 소개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더위나 추위를 마음먹고 피해본 적도,괴로워한 일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추위나 더위는 모두 자연이 베푸는 아름다운 삶의 일정이며,지나 놓고 보면 모두 간절하고 벅찬 즐거운 나날의 갈피갈피였음이 분명하다. 매운 삼동추위나 무더운 삼복철들이 남겨준 시와 사색과 사랑과 싸움의 자취가 남겨준 숱한 아름다움의 역사는 더위란 모름지기 이기는 것도,지는 것도 아니며 더구나 피하는 것도,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다만 더위속의 버젓한 삶의 참뜻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연전에 작고한 최순우 전 국립박물관장의 수필 「즐겁고 아름다운 여름」의 한 구절이다. 실제로 그는 불볕더위보다 더 무덥고 어려운 여건속에서 국립박물관의 기구를 늘리고 인재를 기르며 유물수집·보존에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우리의 아름다움」을 온 세계에 알리는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뿐 아니라 그는 선구적 안목과 감식안으로 수많은 한국미술사관계 논문을 남기기도 했다. 최근에 출간된 『최순우전집』(전5권·학고재간)은 바로 「더위속의 버젓한 삶」을 살다간 그의 족적이다.<손기상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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