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 줏대없는 검찰/이하경 사회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흑색선전물 살포사건 관련 안기부 직원들에 대한 항소과정은 검찰의 진상규명의지에 회의를 갖고 있는 국민들을 다시 한번 실망시켰다.
22일 4명의 피고인이 집행유예판결로 모두 풀려난 이후 서울지검에서는 항소를 포기하거나 피고인측 항소여부를 지켜본뒤 방침을 결정하겠다는 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왔다.
당시 간부들은 『피고인들에 대해 구형량의 2분의 1 이상이 선고될 경우 법원의 판단을 존중해 항소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며 항소포기를 강하게 암시했었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고 비난여론이 비등하자 검찰은 26일 오후 항소장을 제출했다.
검찰은 『여론과 국민정서를 존중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다.
검찰은 항소직후 당초 포기쪽 논리에 동원했던 구형량과 선고형량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부터 달리하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이목을 끄는 중요한 사건일 경우 구형량의 2분의 1 이상이 선고되더라도 집행유예로 풀려난다면 항소하는 것이 관례』라는 것이다.
한 간부는 『항소하더라도 형량이 달라질 가능성은 희박하고 계속 여론의 주시속에 어려움을 겪게 되겠지만 항소포기때 검찰에 대한 비난여론의 강도를 감안해 수뇌부가 최종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러나 검찰의 자세와 변명은 어쨌든 궁색하다.
문제의 핵심은 사건수사에서 드러내고만 검찰의 「한계」라고 본다. 수사초동단계에서부터 형식적·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던 검찰이 끝내 「눈치보기」로 일관,스스로의 위상과 자존을 제손으로 허물어뜨린 결과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국민의 법감정이나 정서와는 거리가 먼 검찰의 업무집행을 지켜보면 과연 우리사회에서 법의 권위와 법치질서 확립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할지 우울한 느낌조차 든다. 당장 이번 총선에서 적발된 선거사범과 앞으로 있을 대선과정의 범법행위 등을 엄정하게 다스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실추된 위신을 바로세우기 위해 검찰이 이 사건 항소심에서 만큼은 진상규명과 처벌의지를 분명히 해줄 것을 기대한다면 다시 또한번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인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