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디 아버지의 꿈, 골퍼 아들이 이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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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우승컵을 든 김경태(左)씨가 아버지 김기창씨를 포옹하고 있다.

아버지는 제주공항 대합실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아들의 우승컵을 가슴에서 떼내지 못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감격에 겨워서인지 한동안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29일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투어 개막전인 토마토저축은행오픈에서 우승한 김경태(21) 선수-. 연세대 체육교육학과 3학년으로, 올해 프로로 전향한 김 선수는 프로 데뷔전에서 우승했고, 캐디를 자청했던 아버지 김기창(54)씨는 시상식장 뒤편에서 기쁨의 눈물을 흠뻑 흘렸다. 그리고 제주를 떠날 때까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들의 쾌거가 너무 기뻤지만 자신의 골프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프로 골퍼 지망생이었다. 부산 해운대골프장 인근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 골프를 시작했고 스무 살 때 프로골퍼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낮에는 연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훈련을 하면서 꿈을 키웠지만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운동을 비교적 늦게 시작한데다 군 복무 공백이 있었고, 훈련을 너무 심하게 하는 바람에 부상도 잦았다.

서른 살 시절에 등산을 갔다가 나무에 왼쪽눈이 찔려 시력이 나빠진 것도 이유다. 프로테스트 응시 제한 연령(35세)을 넘긴 1989년 그는 꿈을 접었다. 그리고 레슨 프로의 삶을 살았다.

아들이 골프를 하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강요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김 선수는 "아버지는 오히려 만류했지만 내가 너무 하고 싶었고 나름의 계획도 있었다"고 말했다.

김 선수는 골프에 소질이 있었다. 골프를 시작한 지 3년 만인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처음 이겼고, 한국과 일본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잇따라 차지했다.

지난해엔 도하 아시안게임 2관왕에 올랐고 올해 초 프로에 데뷔, 첫 대회에서 챔피언에 오른 것이다. 한국 골프 사상 처음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룬 것이다.

김 선수는 "어릴적 아버지에게서 배운 성실성과 정신력이 나의 가장 큰 강점"이라며 "강원도 속초의 실내 연습장에서 레슨을 하면서 어렵게 대회 출전비를 마련해 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받은 골프대회 상금(6000만 원)을 어버이날 선물로 드릴 예정"이라고 했다.

50대 중반의 김씨는 대회 때마다 10㎏이 훨씬 넘게 나가는 아들의 골프백을 메고 20리 길을 걷는다. 김씨는 "친구들은 장성한 아들과 얘기할 기회도 없다는데 나는 아들과 함께 다니며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어 얼마나 좋은 일이냐"며 "아들이 나의 꿈을 대신 이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국가대표팀 한연희 감독은 "김 선수가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꿈을 자신이 이루겠다고 다짐하고 골퍼가 된 것은 골프계에서 유명한 이야기"라며 "형제처럼 다정하게 지내는 김 선수 부자가 너무 부럽다"고 말했다.

제주=성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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