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전형적인 '회사형 인간'입니다. 광고회사 부장으로 맹렬하게 발품과 허리품(인사할 때는 90도가 기본이고, 가끔은 더 내려갑니다)을 팔아 대형 프로젝트를 따낸 직후 이상 징후를 느낍니다. 평생 처음으로 고객과의 회의약속을 까먹은 거죠. 남편이 심상찮은 것을 눈치 챈 아내의 강권에 못 이겨 병원에 갔더니, 알츠하이머라는군요. 이제 겨우 49세인데,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진단이죠(나이 든 사람만 치매에 걸리는 게 아니라는 의학상식은 이미 '내 머리 속의 지우개'가 알려준 바 있지요).
쉬쉬하는 사이 증세는 더 뚜렷해집니다. 부하직원들 이름이 생각 안 나는 것은 물론이고, 매일 다니던 도심에서 그만 길을 잃을 정도입니다.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를 그만둡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딸아이의 결혼식을 치르고 난 다음이라는 거죠. 이제 아내가 대신 일을 하러 나가고, 그는 아내가 적어준 메모대로 밥과 반찬을 데워먹고, 동네를 산책하며 소일하는 처지가 됩니다. 증세를 자각할 때마다, 살기 싫은 마음도 커집니다.
그런데 그를 괴롭히는 것이 잃어가는 기억만이 아니라는 점이 독특합니다. 진단을 받은 초기에는 환각을 통해, 나중에는 힘겨움을 토로하는 그를 맞받아치는 아내의 입을 통해 전에 기억하지 못했던 일들이 되살아납니다. 회사형 인간답게, 딸아이가 입시에 낙방에 밤새 울던 날 술에 취해 새벽에야 귀가했던 것도, 아내가 아팠을 때 무신경으로 넘어간 것도 이제야 기억하게 됩니다. 이 잔혹한 상황을 이 남자가, 그 아내가 어떻게 견디는지는 영화를 볼 분들을 위해 아껴놓겠습니다.
시사회에 맞춰 한국을 다녀간 와타나베 겐의 인사말에 '이키루'(살다 혹은 사는 것, 즉 인생)라는 단어가 나오더군요. 일본어를 잘 모르는 제 귀에 유독 그 말이 들어온 것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이키루'(1952)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나이 든 가장이 참으로 처연하게 인생을 돌아보는 이야기지요.
기억의 능력만이 아니라 망각의 능력도 고마운 일 같습니다. 너무나 괴롭고 미칠듯했던 일도 그 덕분에 군살이 박히고 어느 때쯤에는 잊은 듯 지내게 되니까요. 기억도 망각도 고통도 슬픔도, '사는 것'이라는 최상의 가치 다음이라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으면 싶군요.
이후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