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다다시의 와인의 기쁨 [5]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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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29면

마시는 이마다 다른 그림을 연상시키는 ‘메종 루 뒤몽 뫼르소 2003’.

한국 어린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는 자유로운 시간에 무얼 하면서 놀까? 1월에 방한했을 때 『신의 물방울』의 번역판을 간행하는 출판사 사람이 “한국도 저출산 사회지만 그만큼 부모가 교육에 돈을 투자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읽힙니다”라고 했다. 멋진 일이다.

고흐의 그림이 떠오르는 ‘와인의 추억’

최근 많은 일본 아이들이 노는 시간을 게임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 데 허비한다. 아니면 늦게까지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한다. 책을 읽거나, 해질 녘까지 밖에서 뛰어노는 ‘구김살 없이 풍요로운 시간’이 그들에겐 거의 없다.

나와 남동생이 어릴 때는 지금처럼 신나는 게임이 없었다. 비디오도 DVD도 없었고, 재미난 TV 프로그램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시간이 남아돌았고 집에 있는 갖가지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부모님과 함께 옛날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우리 남매는 학원에도 가지 않았고, 공부는 숙제를 하는 정도였다).

집에 있는 책 중에 가장 좋아했던 게 미술 도록이다.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와 모네의 그림은 아름다웠으며 루소의 그림은 무척 신기했다. 고흐는 스스로 귀를 잘랐다는 에피소드가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다. 그래서인지 아름다운 그림인데 어딘가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밖에 나가서도 잘 놀았다. 당시에는 아직 ‘공터’가 있어서 근처 아이들이 딱히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모여들어 날이 저물도록 뛰어놀았다. 요즘 일본에선 아이들이 밖에서 놀 때면 위험인물을 경계해 부모가 옆에서 지키고 있는데, 예전에는 부모 대신 이웃 노인이 아이들을 멀리서 지켜줬다. 그래서 아이들은 안심하고 마음껏 놀 수 있었다. 우리 남매는 그런 이웃 노인께 퍽이나 사랑을 받았다. 맞은편에 사셨던 할머니는 우리에게 꽃과 식물의 이름을 가르쳐 주셨고, 놀러 가면 간식으로 달콤한 과자를 내주셨다. 그래서 우리 남매는 요즘 젊은이보다 꽃과 나무 이름을 잘 안다. 사회의 약자로만 보이기 쉬운 노인의 참다운 인자함과 위대함도 안다.

우리 남매의 이런 유소년 시절의 경험은 지금 ‘신의 물방울’의 세계에 살아있다. 도미네 잇세가 1982년 샤토 무통 로실드를 마시고 마음에 그린 밀레의 ‘만종’, 프랑스인 셰프가 메종 루 뒤몽 ‘뫼르소’ 2003년을 마셨을 때 떠올린 고흐의 ‘꽃이 핀 아몬드 나무’는 그림 도록에서 자주 펼쳐 본 명화다. 그리고 간자키 유타카가 유언장에 제3사도의 이미지로 묘사한 ‘향수’의 표현은 그야말로 우리가 보낸 어린 시절의 그리운 풍경이다.

지금 자라나는 일본 어린이들이 어른이 되어 근사한 와인을 마신다면 무엇을 떠올릴까. 그것이 게임 주인공이라면 참 삭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린 시절에 빈약한 놀이밖에 경험하지 못한 어른은 ‘신의 물방울’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와인을 ‘풍부하고 우아하게’ 즐기지 못할 것이다. 번역 설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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