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하면서 힘있는 외유내강형 와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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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29면

뤼시아(Lucia)라고만 적혀 있는 깔끔한 레이블에 마음이 끌려 집어든 이 와인은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요새 와인들은 레이블에 이런저런 글귀와 현란한 문구, 심지어 그림까지 넣어 사람의 시선을 끈다. 날로 화려해지는 와인 레이블이 화장한 여자 얼굴이라면, 샤토 뤼시아의 담백한 병 표지는 요즘 각광받는 ‘생얼’이라고나 할까. 포도주도 첫인상이 중요하다. 집어들게 하는 느낌, 분위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와인 시음기-샤토 뤼시아 2001

처음에는 뤼시(Lucie)로 출시됐으나 2001년 ‘빛의 여신’이라는 이름을 따서 뤼시아(Lucia)라는 이 와인이 재탄생하게 되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평론가인 로버트 파커가 첫 빈티지를 90점 주었을 정도. 최근 양조되고 있는 2005년 빈티지의 경우 92~94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얻었다.

더욱 매력을 느끼는 점은 출시한 지 몇 년이 되지 않아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둔 와인이라는 점이다. 낮은 가격에 비해 믿어지지 않는 높은 퀄리티를 보인다. 최근 와인 시장이 아시아로 확대되면서 장사가 좀 되면 우후죽순처럼 생산량을 늘리는 와인들과 다른 점이 도드라진다(연간 1000 Case 안팎 생산). 아마도 맛과 멋의 자신감 때문이 아닐까. 양보다 질을 중시하는 전통 있는 와인 명가의 자부심이 배어 있다.

특히 일반적으로 알려진 개러지 와인들은 압착된 과일 캐릭터에 강한 타닌과 육중하게까지 느껴지는 피니시를 가진 파워풀한 와인들을 말하지만, 개인적으로 뤼시아에 더 좋은 점수를 주는 것은 임팩트가 강하진 않지만 은은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파워를 가진 ‘외유내강(外柔內剛)형’ 와인이기 때문이다. 근육질로 뭉쳐진 보여주는 몸매가 아닌 마른 몸이지만 오히려 가질 수 있는 근육은 모두 지니고 있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는, 그런 와인이 아닐는지.

드디어 병을 앞에 놓고 바라본다. 다크 루비 컬러가 세월을 무색하게 만든다. 조심스레 마개를 딴다. 5년이 지났지만 아직 어린 와인 티가 나면서도 코끝을 스치며 하늘하늘 피어오르는 향기가 농염하다. 밀키한 향으로 시작한 와인은 시간이 갈수록 살을 보태며 섬세한 멋을 피워 올린다. 밀키하면서도 스파이시한 느낌이다. 동글동글하게 느껴지는 기분 좋은 타닌과 뒤를 잇는 깔끔한 애시디티, 그리고 제법 무게감이 느껴지면서 길게 가는 피니시가 일품이다. 밸런스 또한 뛰어나다. 알코올 느낌이 조금 튀는 것 외에는 거의 흠이 없는 와인이다.

농축된 과일 캐릭터를 쏟아내며 뒤를 이어 스파이시한 향과 오크 커피 등의 향들이 더해지며 컴플렉시티의 극치를 보여준다.

지금 마시기엔 너무도 아까운 와인이다. 10년 정도 셀러링한 뒤에 마시면 정말 좋은 와인일 듯하다. 지금 시음하려면 디캔터에서 최소 3시간의 브리딩을 한 다음 드시면 좋겠다. 두툼한 스테이크나 양고기와 드실 것을 권유하고 싶다. 이준혁(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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