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한·일·중 관계사 재조명|일 도요토미 정권·명 몰락 불러|종전과 전후처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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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왜란의 종결은 히데요시의 유언에 의한 것이 아니다. 왜군의 패주로 종결된 것이다. 이미 1592∼93년 침략전쟁으로 왜군은 막대한 병력손실을 입었고(가등군 1만은 5천4백여명으로 줄었으며 1만8천명의 소서군은 64%가 사망했다) 이런 타격의 여파는 당연히 일본 본국에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일꾼을 잃은 일본농토는 황폐하게 되었고, 인민항쟁이 일어날 사회적 위기로 몰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략의 원흉인 히데요시는1597년 2월 다시 14만7천의 대군을 동원, 경상·전라도의 점유를 목적으로 한 정유재난을 도발했다. 그러나 직산과 명량에서의 패전을 계기로 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남해안으로 패퇴하여 왜성에서 농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많은 전상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극심한 추위, 최악의 기아로 전투를 수행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1598년 정월, 적장들은 더 이상 수비할 수 없는 울산·양산·순천에서의 철퇴를 결의하고, 그 승인을 얻기 위해 수길에게 특사를 보냈다. 이린 극악한 상황 가운데 8월 수길이 사망하였고 침략군은 그 유언을 구실 삼아 본국으로 패주 함으로써 전쟁은 종결됐던 것이다.
현해탄이라는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한국과 일본 두 민족사이엔 예부터 군사적 충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특히 고려말 조선초기에 걸쳐 설쳐댄 왜구들에 의해 한반도의 해안·도서지방은 한시도 조용한 때가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 전기에는 왜구의 소굴이었던 대마도를 정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후로도 삼포왜란과 같은 왜인들의 난동과 왜구들에 의한 비정규적인 게릴라식 노략행위는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히데요시가 감행한 무도한 침략전쟁인 임진·정유왜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임진왜란은 근대이전의 일본이 행한 최대규모의 군사도발이었다.
왜란으로 인한 우리 국토의 황폐와 물질적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또한 10만 가까운 사람이 일본으로 납치 당하였다.
전쟁의 아픔에서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이후 오랜 세월이 필요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 전쟁은 한국인의 심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조선당국은 이런 타격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강인한 체제의지력이 있었고 반성과 생동의 역사를 이어나갈 수 있는 저력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전후 불과 2년만에 도요토미 정권이 쓰러지고 도쿠가와 정권이 들어서는 정변이 벌어졌다. 한편 재조번방을 대의명분으로 조선에 원병을 대거 출동시켰던 명나라도 국력 소모를 돌이키지 못한 채 신흥 여진족인 청국에 중국의 지배권을 내주어야 했다. 왜란은 이처럼 관계삼국 모두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7년간에 걸친 처참한 전쟁은 왜군의 패퇴로 막을 내렸으나 한일간에는 그 후에도 많은 문제를 남겼다. 지연적 숙명성을 가진 두 나라이기에 양국의 새로운 당사자들은 전후문제 처리를 서두르게 된다.
국교 재개의 문제를 가장 서둘러 교섭에 나선 것은 전쟁 전부터 조선왕국과의 경제문제에 사활이 걸려있던 대마도였다. 대마도주는 왜군이 패퇴한 1개월 후인 1598년 12월부터 조선에 사신을 거듭 보내 통교재개를 요청해왔다.
한편 도요토미 정권을 타도하고 일본의 지배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정권도 곧 사신을 파견, 자기네 정권이 조선침략과 무관했던 점을 강조하면서 교린관계의 재개를 요청했다. 그들은 수차에 걸쳐 조선인 부로 납치인들을 송환해 그들로 하여금 일본정세를 설명케 하는 간접적 방법을 쓰기도 했다. 도쿠가와 정권이 국교를 서두른 데는 집권 초기에 정권의 안정과 권위의 강화를 꾀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일본의 거듭되는 국교재개요청을 방은 조선정부는 일본국내 정세의 변화를 탐색하는 한편, 전시에 일본으로 납치된 10만여명의 본국송환과 침략재발에 대한 방비에 노력하게된다.
왜란이 인쇄전쟁이니 서적전쟁 또는 도자전쟁이니 하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유는 일본이 이 전쟁을 통해 발달한 조선의 활자기술과 유학서적, 그리고 도자기기술을 약탈함으로써 문화적으로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란은 또 수많은 노예를 창출케 한 전쟁이라는 점에서 노예전쟁이기도 했다. 조선으로서는 이들 적국에서 신음하는 수많은 납치노예들을 조기 생환시키는 노력이 필요했다.
이런 목적에서 1604년 탐적사로 사명대사 유정을 파견하여 적국사정을 탐사하는 한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교요청국서와 전란 때 왕분을 능멸한 범릉적의 포송을 국교재개의 선행조건으로 요구하였다. 이것이 이루어지자 세 차례에 걸쳐 회답겸쇄환사를 파견(1607, 1617과 1626년에 파송)하여 피납인 쇄환과 국교재개의 정지작업을 진행시켰다. 오랜 교섭 끝에 1636년 조선 측은 국가의례사절인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 교린의 국교를 회복했다. 이후 양국간에는 의례통교인 통신사외교와 삼판사·문위행이 대마와 동래를 오가는 실무외교라는 이원구조의 국교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게 되었다. 통신사 외교관계의 회복은 당시의 국제정세에 즉응한 조선왕국의 능동적 외교대책이기도 했다. 이는 당시 만주 땅에서 흥기한 여진족의 군사적 압박과 명나라의 쇠약으로 명을 정점으로 하는 아시아적 책봉체제의 변화가 요구되는 국제정세에 직면한 조선이 남방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새로이 조정한 결과였던 것이다. 즉 북의 근이에 대응하기 위해 남의 원이와 화평 관계를 맺는다는 외교구도였다.
한편 일본과의 국교재개는 조선 국초 이래의 사대교린 외교정책으로의 회귀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조선은 정치적 국교재개에 앞서 1609년 기유약조로 대마도에 대한 경제교류를 수복해 주었으며, 그후 통신사외교가 열린 후에는 통신사일행에 수반되는 문화전달교류를 활발히 하여 문화적 선진국가로서의 역사적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원정><서울대명예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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