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선거비(정치와 돈:8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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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운동원 경비등 줄여 “1억1천만원만 쓰시오”/후보들 외면… 철저 감시 필요/주간연재
중앙선관위(위원장 윤관대법관)가 지난 18일 발표한 14대 국회의원 후보 예상 평균비용제한액은 1억1천5백만원이다. 이 액수는 13대의 경우 8천5백만원에 비해 36% 증가한 액수다.
선관위의 비용제한액 공시는 법정 의무사항이고 위법사실이 발견되면 체형이 가해지는 「엄격한」조치가 따르게 돼있지만 지금 표밭을 뛰고 있는 후보들이 비용제한액을 의식하는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리 잘봐줘도 민자당의 경우 후보 평균 선거비용은 약 10억원을 넘나들고 민주당은 수억원,국민당은 10억원대 이상을 쓸것이라는게 대체적인 정가의 관측이기 때문이다.
선관위의 공시 비용제한액은 현실화쪽보다는 오히려 기준을 더욱 엄격하게 낮춰 잡았다. 역대 제한액을 보면 11대는 4천9백만원,12대는 7천만원이었다.
12,13대는 각각 이전 총선때와 비교해 42%,51%증액됐으나 14대는 36%로 늘어나 상대적으로 인상률이 낮아진 셈이 됐다.
14대에서 지역면적과 인구수를 고려해 가장 많은 선거비용이 예상되는 곳은 충무­통영­고성(제한액 1억9천만원)이고 가장 적은 곳은 구리시(7천7백만원)다. 그래서 그런지 충무­통영­고성은 정순덕·김동욱·최이호·허문도·홍순우씨등 출마예상자들의 치열한 선거전과 함께 「돈뿌리기」도 만만치않다는 얘기가 많다.
선관위측이 매긴 비용항목은 ▲선거사무소·연락소 임차료 또는 유지비 ▲선거사무장·연락소장·운동원의 실비보상비 ▲자동차·선박의 임차료 또는 유지비 ▲현수막·소형인쇄물 등의 작성 및 게시경비 ▲후보 자신의 경비 ▲기타 선거연락경비등 6개항이다.
이번 책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선거사무장 등의 비용세목에서 수당과 숙박비는 삭제하고 식비와 잡비만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선거사무장의 경우 13대 일당 8만9천원에서 14대에는 9천원,운동원은 13대 4만8천원에서 5천원까지만 받을 수 있게 했다.
따라서 개정선거법에 따라 선거운동원수가 대폭 늘어났음에도 한 후보가 운동원 실비보상액으로 지급할 수 있는 비용은 13대 5천7백만원에서 2천6백만원으로 격감한 결과가 됐다.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용이 67%에서 23%로 떨어진 것이다.
현실성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선거비용중에서 하방경직성(오르기는 쉽고 내리기는 어려운)이 가장 높은 인건비를 「강제적으로」깎겠다는 선관위의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
선관위측은 이를 사상처음으로 운동원의 자원봉사체제를 도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선거비용을 소위 「현실화」하는 일은 현재의 정치풍토상 돈선거를 부추길뿐이라고 보고 운동원 경비를 대폭 삭감,「돈을 벌기위해 선거사업에 뛰어드는 것이 법적으로 불가능한 여건을 만든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사용가능한 자동차와 선박의 상한 대수도 각각 5대·5척에서 공히 3대·2척으로 줄여 13대보다 비용을 삭감했으며 후보의 활동비도 선거기간 17일중 13대 대비 1백여만원이 삭감된 1천3백만원으로 하향조정했다.
항목중에서 유일하게 늘어난 것은 현수막등 비용 부분. 53만원에서 80배가량 증액된 4천1백만원이 계상됐다.
그러나 대다수 후보들은 이 제한기준을 거의 거들떠볼 생각도 않는것처럼 보여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 여당공천자는 『요즘 일당을 받지않고 선거운동을 해주겠다고 나설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면서 방법을 강구중이라고 했는데 정당소송은 물론 무소속의 출마예상자들도 이구동성이었다.
후보들은 운동원들에게 ▲목돈으로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을 주거나 ▲당선되면 상당한 액수의 보상을 약속하든가 ▲해외여행이나 취직 등을 시켜주는 여러 불법보상 방안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당국이나 공선협 등의 철저한 추적과 감시가 요구되고 있다.
선관위의 비용제한액은 보통 후보들에겐 극히 비현실적인 「공자님 말씀」정도로 치부되지만 통치권자의 강력한 의지와 정당·후보간 신사협정,선관위 및 사직당국의 가차없는 처벌이 동시에 진행된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는게 선관위의 인식이다.
언론인 박권상씨는 영국의 역사적 예를 든다. 영국도 19세기 중엽까지 후보 1인 평균 비용액이 15만파운드(현재 비용으로 환산하면 4백억원)로 「선거망국론」이 나돌고 사회 전체가 휘청거렸다.
자유당의 글래드스턴 정부는 1883년 「부패방지법」 등을 제정,여야를 막론하고 일정액 이상이 돈을 쓰는 후보를 가차없이 처벌해 오늘의 공명선거 풍토 초석이 됐다고 한다. 당시 후보들은 『효과는 없으나 상대방이 쓰니 안 쓸수가 없다』는 무의미한 돈경쟁속에 시달렸다는데 정부의 처벌이 최고의 수준에 이르자 스스로 신사협정을 맺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 영국의 후보자들은 8백만원 이상 선거비사용을 금지하는 법의 적용을 받고 있지만 후보나 유권자나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고 있다고 한다.
돈쓰는 선거가 반드시 극복할 수 없는 문화풍토나 관습에 의한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선관위의 공시액을 의미있게 만들려는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전영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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