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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곧 역사” 자부심 없으면 사극 못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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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 야외촬영 1박2일의 기록

"컷! 거기 깃발이 꼬였잖여."(김종선 PD) "어이, 창으로 깃발을 끄잡아 당겨!"(배현식 현장반장)

확성기로 불호령이 떨어지자 스텝 한명이 부리나케 뛰어간다. 어수선한 틈을 타 '대조영' 최수종이 밧줄에 묶인 팔을 내린다. 오후 네시. 점심 식사 뒤 3시간 이상을 양팔이 묶인 채 촬영하고 있다. 분장 담당이 다가가 얼룩진 화장을 고쳐준다. 김 PD가 외쳤다. "자, 다시 가자고! 대조영, 서서히 고개를 든다. 그렇지, 눈을 깜빡인다…"

5일 강원도 속초 한화리조트 내 KBS 대하드라마 '대조영' 오픈세트장. 주인공 대조영이 당나라에 끌려와 저자거리에서 형벌 당하는 장면을 찍는 날이다. 다음달 13일 방송될 70회분이다.

촬영장은 활기가 넘쳤다. 마침내 시청률 30%에 다가선 데 대한 자신감이다. 스텝과 출연진 너나 할 것 없이 "탄력 받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김 PD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보인다. 히트사극 '태조 왕건' 이후 4년여 만에 현장에 돌아온 그다. 잘 알려지지 않은 발해사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시청률 부담을 안고 시작했다. 고구려를 배경으로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타사 드라마(MBC '주몽', SBS '연개소문')와 경쟁도 신경이 쓰였다.

"사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여. 고구려가 망하는 과정이 예상보다 오래 걸렸는데, 앞으로 속도가 빨라징께.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이민족을 어떻게 규합하고 새 나라를 세우는가, 이게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거요." 섬진강변 출신 김 PD의 말투가 구수하다.

김종선 PD등 스태프들이 촬영 현장을 지켜보며 디테일을 지시하고 있다. [사진=강혜란 기자]

8일 60회가 방송된 '대조영'은 고구려 패망 이후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길용우 분)을 중심으로 한 지하반란군 '동명천제단'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65회 정도에서 동명천제단이 일망타진 당하고 대조영 등 주모자들이 당나라로 끌려간다.

6일 촬영분은 이들이 당에서 겪는 혹독한 시련의 현장. 최수종 등 3명의 연기자는 몇시간째 밧줄에 몸이 매인 채 리허설과 촬영을 반복했다. 지치기는 200여 보조출연자들도 마찬가지. 사인이 떨어지면 분주히 오갔다가, 화면에서 배제되면 쪼그려 앉아 대기한다. 화면상으론 수초에 불과한 장면을 위해 수십번 다시 찍고 컷을 한다. 오후 6시. 드디어 이날 촬영분이 끝났다.

"우린 시간표가 철저혀. 조금이라도 안 맞으면 줄줄 밀리니께." 김 PD 말대로 일정은 한치 오차도 없이 진행된다. 매일 새벽 6시 기상, 각자 분장과 식사 후 7시 집합, 촬영, 정오에 점심 식사, 오후 1시쯤 촬영 재개, 오후 6시 종료 후 휴식. 단, 야간 촬영분이 있는 날은 밤새 강행군이다.

다음날 오전 7시. 그날 새벽 1시에 서울에서 출발한 보조출연자들이 세트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나라 황궁 뜰에서 대조영이 당 최고 무사와 결투를 벌이는 신이다. 기나긴 하루가 또 시작됐다.

촬영 도중 틈만 나면 대본을 점검하는 '대조영' 최수종. [사진=강혜란 기자]

#툭하면 부상 위험… 그래도 '사극은 내 운명'

"아유, 다른 것보다 집에 가고 싶어요." 최수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월.화요일은 수원에서 세트촬영, 수.목.금.토 나흘은 문경과 속초를 넘나드는 야외촬영. 지난해 4월 크랭크인했으니 벌써 1년째 동가식서가숙 신세다. "이것 하는 동안은 여기만 매달려도 벅차요. 겹치기 출연은 엄두도 못 내죠."

체력적으로 부담되긴 중견급이 더하다. "15kg짜리 갑옷을 입고 하루종일 뛰어봐요. 현대극보다 에너지가 5배는 더 들죠."('흑수돌' 김학철)

전투신 등 위험 장면이 많아 부상도 잦다. 특히 낙마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지난해 8월 '설인귀' 이덕화가 낙마사고로 앞니가 5개나 부러지고 손목뼈와 코뼈가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었다. '홍패' 유태술도 지난해 4월 500kg 무게의 말과 함께 굴러 어깨뼈가 부러졌다. 하지만 장기 입원 치료할 겨를이 없어 응급수술을 마치자마자 촬영에 복귀했다.

힘들다고 혀를 내두르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베테랑 사극파'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사극 최고 히트메이커'로 뽑힌 최수종은 '해신' 이후 2년 만에 또 사극이다. "다신 안하려고 시놉시스 받고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이덕화 선배가 준 책을 읽고 대조영이란 인물에 반해서…"

역사적 인물이 되어본다는 것… 출연진이 입을 모으는 '사극의 첫째 매력'이다. "내가 한명회도 돼 보고, 윤원형도 돼 보고, 지금은 당나라 최고관리도 연기하잖소. 변화무쌍한 캐릭터, 그게 연기하는 재미지."(이덕화)

그만큼 연기에 대한 자부심이 높다. "사극은 처음인데 정말 많이 배워요. 실력에 자신이 없으면 하기 힘든 것 같아요."('미모사' 김정현)

보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내 나이쯤 되면 현대극에서 맡을 역할이 없어요. 그렇지만 사극에선 무궁무진하죠."(이덕화)

"다들 힘들어 꺼리니까 그만큼 배역 경쟁이 덜하죠."(한 중견연기자)

힘들기 때문에 사극을 사랑한다는 말도 나온다.

"집중력이 중요하니까, 내가 진짜 '연기'를 하고 있구나 하는 뿌듯함이 들죠."(최수종)

"1 ̄2년에 걸쳐 작품 하나 끝내고 나면 제대로 뭔가 했다는 보람이 있지. 그에 비하면 현대극은 완전히 노는 기분이랄까."(이덕화)

그래도 그 누가 김종선 PD의 자부심에 비할까.

"사극, 힘들죠. 나도 왕건 끝내고 다시는 사극 안한다고 했응께. 그런데 현장 떠나 CP(책임 프로듀서)로 있는 동안 평양엘 몇 번 다녀왔는데, 어허, 이런 역사를 얘기해야겠다 싶더라고. 국민이 힘들 때 희망과 비전을 줄 수 있는 역사, 세계 최강 중국에 맞서서 소강국을 세운 역사, 이런 걸 사극이 아니고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겨."

속초 글·사진=강혜란 기자, 동영상=강대석 JES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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