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점으로 돌아간 「시험지」수사(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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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경비원의 자백으로 뜻밖에 쉽게 해결된 것 같았던 후기대 입시문제 도난사건은 자백을 뒷받침할 아무런 물증도 찾지 못해 수사가 원점으로 되돌아가게 됐다. 시험지나 칼의 행방이 어디냐,공범은 있느냐 하는 것등 자백내용을 전제로 한 의문 이전에 이제는 과연 경비원 정씨가 범인은 범인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까지 들게 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현재로선 정씨가 범행을 자백했다는 경찰의 발표만이 있었을뿐 정씨가 직접 보도진들에게 자백사실을 재확인해준 바도 없고 변호인의 도움도 받고 있지 않는 상태여서 자백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도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다.
그러고 보면 애초 경찰의 「범인검거」발표는 너무도 성급하고 지나치게 단정적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유력한 용의자가 수사선상에 떠올랐다는 정도의 수사결론만 내리고 다각적인 초동수사를 벌이는 수사자세가 필요했다고 본다.
경찰이 아무런 물증의 확보도 없이 범인검거를 서둘러 발표한 것은 다른 사건때와는 달리 검찰이 수사초기부터 개입함에 따라 혹시 공을 검찰에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범행자백을 받아낸데 들떠 발표만 서두른 결과 검찰과 경찰은 그 수사능력만 의심받게 되었다. 수사시간을 벌기위해 다른 범죄사실로 구속을 할 수 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할 수는 있겠으나 자백을 받아내고도 시험지의 행방은 커녕 칼조차 찾아내지 못한 무능은 비난받기에 족한 것이며 편법수사라는 빈축마저 사게 되었다.
수사가 원점으로 돌아간 현 시점에서는 설사 수사상의 어려움이 더 가중된다 하더라도 피의자인 정씨에게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기회를 주는 것이 바른 태도라고 본다. 선진국에서는 수사초기부터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기회를 주고 있기도 하거니와 우리 헌법에도 그것은 국민의 기본권이 되어 있다.
자백이 과연 어떤 과정,어떤 여건에서 이루어졌는지 알 수는 없으나 만의 하나라도 강요된 것이라면 그것은 중대한 문제다. 정씨는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에게는 범행조차 부인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르는 의혹을 씻어내기 위해서도 정씨에게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기회를 주어야 하며 또 그러한 가운데서도 정씨가 범인임을 입증해내야 검찰과 경찰의 수사력이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범인을 밝혀내는 것도 사회정의의 추구이지만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역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사회정의다.
일단 정씨가 이 사건에 관계되었음은 분명하다고 전제하더라도 경찰이 처음 밝힌 범행동기는 석연치 않기 짝이 없다. 단지 같은 교회신도의 딸을 도우려고 그같이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까. 범인임이 틀림없다면 왜 시험지의 처리에 관해 그처럼 횡설수설하여 수사당국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는 것일까.
일반이 느끼는 이런 의문은 수사당국도 물론 갖고 있을 것이다. 이제 수사가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게 된 만큼 당국은 정씨의 자백에만 매달리는데서 벗어나 수사방향을 다각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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