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칼럼] 문화 유산 지우는 사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빙허 현진건은 우리 국민에게 널리 알려진 소설가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현진건의 작품은 약방의 감초격으로 등장한다. '빈처''고향''운수좋은 날''술 권하는 사회''B사감과 러브레터' 등 그가 남긴 작품들은 한결같이 일제하에서 수탈받고 고통받던 우리 민족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처럼 식민지 시대를 온몸으로 지켜온 빙허의 고택이 감쪽같이 철거된 사실이 드러났다. 관할 구청인 서울 종로구청과 상급기관인 서울시가 수수방관하는 사이 또 하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1936년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할 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옹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에 연루돼 1년간 옥고를 치른 빙허는 이 집에 머물면서 일제의 탄압에 맞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장편 역사소설 '무영탑'과 '흑치상지'등의 작품을 집필했다.

빙허는 오욕으로 점철된 일제 암흑기를 온몸으로 밝힌 횃불 같은 존재였기에 후손들이 그 업적과 자취를 기리는 것은 당연한 도리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빙허의 고택이 철거됐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고택의 멸실과 함께 빙허의 삶과 관련된 모든 흔적이 지워졌다는 것이다. 빙허의 대구 생가와 소설 '빈처'를 집필한 관훈동 고택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빙허의 숨결은 이제 그 어느 곳에도 남아 있지 않다.

개발의 논리를 앞세운 정책으로 인해 문화예술인들의 흔적이 이처럼 지워지고 있다는 점은 실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문화예술가들이 남긴 작품도 중요하지만 삶의 모습이 담긴 유산이야말로 물질로 따질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이제라도 서울시는 철거된 부지를 매입, 현진건의 삶과 문학을 기념하는 장소로 꾸며 후세 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최진규 충남 서령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