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이현의새콤달콤책읽기] 열여섯 소년과 소년 절망적이도록 찬란한 봄날의 사랑이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바야흐로, 봄이다. 춘삼월을 사람 나이로 따지면 열대여섯 살쯤 되지 않을까. 가슴 속이 저릿저릿하게 새싹 움트는.

열여섯 살에 난 뭘 했더라. 심야 라디오방송에 심취해 늘 잠이 부족했고, 짝사랑 상대가 석 달에 한 번 꼴로 바뀌었으며, 앞 머리칼을 가위로 혼자 다듬었다 망치는 바람에 부분가발을 사야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 말고는 별다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이거 하나만은 분명하다. 열여섯 살을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쳐댔던 것. 그랬다.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고 간곡히 열망했었다.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생각과 느낌)의 주인공은 태어난 지 16세 9개월 된 소년이다. '헨리'라는 고상한 이름이 있지만 남들 앞에서 자신을 '헬'이라 소개한다. '지옥'과 같은 발음. 그런 식의 위악도 그맘때의 특권일 것이다.

소설은 헬이 친구의 무덤을 파헤치고 무덤 앞에서 '이상한 짓'을 하다가 체포되었다는 신문기사로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객관적 사실이 그러하듯 그 뒤에는 숨겨진 이야기들이 있고, 그것은 헬의 자술서와 그를 면담하는 자선사업가의 보고서라는 이중 형식을 따라 펼쳐진다.

내성적이고 자의식 강한 문학소년이 어쩌다 무덤훼손사건이라는 반사회적 범죄의 용의자가 되었을까? 아니. 이 질문은 틀렸다. 그는 무덤을 훼손한 것이 아니라 춤을 추었을 뿐이니까. '마법의 콩'을 가졌던 특별한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아니. 이 문장도 완벽하지 않다. 그 친구는 사실 그의 사랑하는 연인이기도 했으니까.

소년과 소년 사이의 우정을 넘어선 사랑. 어떤 관계에 꼭 이름을 붙여야만 안심하곤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동성애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소년들은 세속의 명명과는 상관없이 그저 한 시절을 함께 질주하고 있었을 뿐이다. '속도가 저만치 앞에 있고 내가 그걸 잡으러 쫓아간다는 느낌'에 시달리던 시절, 하찮은 내 존재를 탈바꿈하고 싶다는 욕망과 타인에 대한 열정이 뒤섞여 착각을 일으키던 시절, 누구나 지나왔지만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어떤 시절…. '내 무덤에서…'는 절망적이게 찬란하던 그 봄날에 관한 소설이다.

서랍 깊이 넣어두었던 봄옷을 꺼내다가 오래 전 선물 받은 실크스카프 한 장을 발견했다. 하늘빛 물방울무늬가 점점이 박혀있는 얇은 스카프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난 봄날들의 기억이 한꺼번에 밀어닥쳤으나 동시에 그날들이 이제는 정말로 지나가 버렸음을 깨닫고 말았다.

봄날을 맞이하기도 전에 새 봄날 또한 가버릴 것을 미리 쓸쓸해하는 내 나이 올해 서른하고 몇인가! 열여섯 살 헬이 진지하게 묻는다. '경험은 은행에 돈이 쌓이듯 우리 안에 쌓이는 걸까? 거기에 이자도 붙어서 나중에 어떤 근사한 것을 살 수 있게 될까?' 나 대신 누가 좀 대답해주면 좋으련만.

정이현<소설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