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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경성야화(59)|창씨개명|조용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1940년 2월부터 시행한 창씨개명 운동은 큰 저항을 받았으나 총독부는 갖은 비인도적 강제수단을 모두 동원해 이를 관철시켜 나갔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배급을 주지 않고 관공서에서도 각종 서류의 접수를 거부했으며 기차표도 팔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실시한지 반년만인 1940년 9월20일까지 전체의 80%인 3백20만호를 강제로 창씨 시켰다. 그러나 창씨개명 운동은 일본사람 자신들도 좋아하지 않고 반대하였다.
식민지 백성들이 무슨 턱으로 일본식으로 성명을 고쳐 일등국민이 되려 하느냐, 조선 놈들이 우리도 똑같은 일본 국민이라고 덤벼들면 어떻게 하려느냐는 발상이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이 같이 다니는 학교에서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학생에게 창씨 했다고 건방지다고 구타한 사건이 경향 각지에서 일어났다.
특히 일본여자들은 조선사람이 건방져진다고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가하면 경성제국 대학의 교수들은 조선사람들이 한사코 싫어하는 창씨개명을 총칼을 가지고 강행하는 것은 미나미 총독의 잘못이라고 반대하였다.
이 통에 이에 동조하였던 마텔이라는 프랑스인 불어강사만 한국에서 내쫓겼다. 미나미는 반대운동을 하는 경성대학의 교수들이 미웠지만 동경에서 문제가 일어나면 큰일이니 교수들에게는 감히 손을 못 대고 애꿎은 외국인 강사만 내쫓은 것이다.
창씨개명 때문에 경향 각지에서 울분을 터뜨리는 갖가지 소동이 많았지만 워낙 총독부의 압력이 강해 분을 참고 성명을 갈게 되었다. 총독부는 창씨 문체에서 자신을 얻은 여세로 이번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시켰다. 총독부에서는 신문을 찍을 종이가 부족하다는 핑계로 두 신문사 간부를 불러 폐간을 종용하였다.
조선일보 측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지만 동아일보 측은 이에 응하지 않고 사장 송진우가 동경으로 건너가 요로를 찾아다니며 폐간에 반대하는 운동을 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당초의 방침을 굽히지 않고 드디어 1940년 8월10일을 기하여 두 신문을 폐간시키고 저희들의 기관지인 매일신보 하나만 남겨놓았다.
총독부에서는 수양동우회를 없애고, 흥업구락부를 없애고, 다시 총독정치에 방해되는 동아·조선일보 두 신문을 없애놓았으니 이제는 탄탄대로로 아무런 거리낌없이 대륙을 침략해 대동아공영권을 수립하는 길을 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해 10월 총독부는 조선정신동원 연맹을 「국민총력연맹」이라고 고치고 애국반 훈련방침을 한층 강화한 다음 11월1일에는 국민총력연맹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총력 앙양대회를 열고 사무총장에 한상룡을 임명하였다.
한가지 남은 것은 국내에 있는 항일독립 투사들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일이었다.
총독부에서는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을 1936년에 만들어 소위 요시찰인들의 동태를 감시하여왔고 1941년에는 사상범예비 구금령을 발표해 조금이라도 행동이 수상한 사상범은 언제라도 무조건 구속하여 감금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총독부는 이렇게 빈틈없이 조선민중을 가두어놓고 채찍질해 전쟁협력의 길로 이끌어갔다.
1941년에 들어 5월에는 루스벨트 미국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6월에는 독일의 나치군대가 소련국경을 넘어 공격하여 독소전쟁이 발발했다.
7월에는 이타가키가 조선군사령관이 되고 10월에는 도조가 수상이 되더니 필경 l2욀8일에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날 라디오는 온종일 일왕이 영국과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하는 조서를 낭독하고, 군가를 부르고 진주만에서 미국 군함을 쳐부수는 이른바 혁혁한 전과를 되풀이 발표해 국민의 전의를 앙양시켰다.
그리고는 낱마다 영국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라는 큰 군함을 격침시켰다느니, 남쪽 어디 어디를 점령하였다느니 하고 온종일 군가를 방송하는 등 법석이었다.
이듬해 2월15일에는 영국의 극동전략거점인 싱가포르를 점령하였다고 밤에 제등행렬까지 하면서 대대적으로 축하하고 전쟁은 이제 문제없이 이겼다며 좋아하였다.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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