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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살~짝 별난 동네 이태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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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3월이었습니다.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는 버스를 타고 이태원을 지났습니다.영어로 쓰인 간판, 미군 소매 끝을 잡아채는 호객꾼, 쩍이는 나이트클럽 네온사인…. 리벽 너머 세상은 몹시 낯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태원이 요즘 확 바뀌었습니다. 최신 유행의 원피스를 살 수 있고, 각국의 먹거리가 있으며 골동품 가게와 헌책방이 공존합니다. 과거와 현재가 겹치고 한국과 세계가 함께 숨쉬는 공간. 어른들의 놀이터가 된 그곳, 이태원을 다시 찾았습니다.

글=홍주연 기자 <jdream@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2월 24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 거리는 활기에 넘쳤다. 짧은 반바지에 가죽 부츠, 몸에 달라붙는 스키니 청바지를 입은 커플들이 거리를 활보했고, 브런치(아침 겸 점심식사) 식당에는 30대 여성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의류 매장이 몰려 있는 이태원 시장은 쇼핑 나온 20~40대 여성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태원에서 구두매장을 운영하는 채혜선씨는 "주말 손님이 최근 두세 배 늘었다"고 말했다.

이태원이 또 한번 얼굴을 바꿨다. 배나무가 많아 '이태원(梨泰院)'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이곳은 한국 현대사처럼 파란만장한 부침을 겪었다. 1900년대 초 이태원은 일본군 사격장이었고, 미군이 용산에 주둔한 뒤엔 유흥가의 대명사가 됐다. 2000년대 중반 들어 이태원은 또 한번 변신했다. 해밀턴호텔 뒷골목에 특색 있는 음식점이 하나 둘 생겨나더니, '짝퉁 전문'이던 가게들까지 감각적인 의류매장으로 거듭 났다. 외국인보다 내국인이 많아진 것도 이쯤부터라고 한다. "1년 전부터였죠. 이태원 '물'이 바뀌었어요. 잘 차려 입은 트렌드 리더와 방송국.외국 기업 직원들이 찾기 시작했어요." 이태원 관광특구연합회 이동오 이사의 말이다.

'이태원족'은 연령대와 취향이 다양하다. 회사원 김영호(42)씨는 대학 동창들과 이태원 바를 자주 찾는다. 김씨는 이태원의 장점에 대해 "강북과 강남의 중간이어서 직장인들이 모이기 좋다. 외국인이 많아 분위기도 독특하다"고 말했다. 주부 이성진(57)씨는 쇼핑 때문에 이태원족에 합류했다. "명품과 비슷한 옷을 10만원 내외에 살 수 있어요. 골동품 골목에서 인테리어 제품을 고르는 재미도 있죠." 이태원의 주인공은 뭐니뭐니 해도 30대다. 회사원 최서연(30)씨는 "이태원에 오면 배낭여행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파티복 원피스처럼 특이한 옷도 많다"고 말했다. 회사원 안주연(34)씨는 "청담동처럼 음식 값이 비싸지 않아 좋다. 트렌드에 뒤떨어지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즐길 수 있어 만점"이라고 말했다.

대중문화평론가 김봉석씨는 "다국적 문화의 상징인 이태원이 뜬다는 것은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려는 사람이 많아졌음을 의미한다"며 "특히 소비지향적 강남 문화에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30대들이 주류를 이루는 듯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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