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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서 '필드'로 간 사연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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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테니스 세계랭킹 42위까지 올랐던 스콧 드레이퍼(32.호주)가 골프로 전향했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과 홈런왕 마크 맥과이어, 축구 천재 디에고 마라도나 등 다른 종목 선수가 은퇴 후 골프에 도전한 예는 흔하다. 그러나 드레이퍼는 이들과 다르다. 드라마틱하고 성공 가능성도 커 할리우드에서 그의 스토리를 영화로 만들 예정이다.

드레이퍼는 강박장애 환자다.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도 자신이 이 병에 걸렸다고 최근 고백했는데 정리되지 않은 것을 참을 수 없는 병이다. 이 병 때문에 훈련에 집중하기 어려웠으나 그는 1992년 6월 윔블던 테니스 주니어 남자 복식에서 우승했다. 우승 후 '유망주'라는 주위 기대가 커지자 강박장애는 심해졌다.

98년 결혼해서는 부인이 불치병인 낭포성 섬유증 환자인 것을 알게 됐다. 유전자 이상으로 폐 등에 문제가 생겨 호흡이 곤란해지는 병이다. 드레이퍼는 배우자를 극진히 간호했다. 부인을 돌보다가 시간에 쫓겨 급히 코트로 달려나가는 것이 일상이었으나 사랑의 힘은 강했다. 드레이퍼는 98년 권위 있는 ATP 투어 퀸스클럽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드레이퍼는 99년 5월 세계랭킹 42위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두 달 후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성적도 곤두박질쳤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드레이퍼가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술을 많이 마셔 체중이 9㎏이나 불었고 무릎 부상도 악화됐다. 골프와 인연을 맺은 것도 이때다. "필드에 나가 있는 5시간 동안엔 부인의 죽음을 잊을 수 있었다"고 드레이퍼는 말했다.

올 초엔 테니스 세계랭킹 1위를 했던 레이튼 휴이트의 코치를 잠깐 맡기도 했으나 "나는 코치가 아니라 코치를 받아야 할 사람"이라며 사임하고 골프에 매진하고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렬되어야 마음이 안정되는 드레이퍼의 병은 정교한 스포츠인 골프에 도움이 될는지도 모른다. 드레이퍼는 지난 11일 호주 PGA 투어 뉴사우스웨일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성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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