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1부] 여름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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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김태현]

나로 말하자면 마음속으로 아빠를 떠나는 연습을 매일 하고 있었다. 시작은 아빠의 결혼식장에서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그때 아홉 살이었다. 나는 레이스가 잔뜩 달린 푸른 드레스를 입고 식장으로 들어갔다. 아빠의 결혼 축가를 연주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피아노 학원 가는 일을 죽자고 싫어하는 아이여서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었는데 이 곡만은 아주 열심히 연습을 했었다. 자기 부모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또 그 예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은 무언가 좀 흥분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피아노 선생님에게 "아빠의 결혼식 날 칠 곡이에요" 하고 말했을 때 피아노 선생님은 잠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더니 "작은 아빠?"하고 되물었다.

"아니요. 우리 아빠요. 우리 아빠가 이번에 결혼을 하시거든요."

피아노 선생님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내가 지금 아이 앞에서 이러면 안 되지, 하는 결심을 스스로 한 사람이 늘 그렇듯 꾸민 듯 밝은 웃음을 지으며 "그래, 우리 열심히 한번 연습해보자. 그러니까 연습에 더 빠지면 안 된다" 하고 말했다. 내가 그런 말을 할 때 어른들이 내 앞에서 꾸민 웃음을 짓는 것은 그리 드문 경험은 아니었다. 그리고는 그들은 세상에서 더없는 고아를 보는 것처럼 연민과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그 연민의 덕분에 나는 자잘한 벌은 면제받곤 했지만 그것은 결코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 또한 일종의 나쁜 기억이었다. 어쨌든 나는 아빠의 결혼식장에서 '즐거운 나의 집'을 연주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겨레 길이 쉴 곳도

꽃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연주가 끝나고 살짝 돌아보니 아빠는 이상하게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의 눈길 끝에는 화사한 풍선들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새 엄마는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띠고 "위녕 잘했어" 할 때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새엄마를 좋아했었다. 엄마라고 불리는 사람을 가진다는 것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그녀는 결혼 전부터 우리 집에 드나들며 내 피아노도 봐주고 함께 놀이공원에도 가주었다. 아빠랑 할머니랑 이렇게 셋이 놀이공원에 갔을 때와는 다르게 아무도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우리는 완벽한 가족이었다. 사람들은 알까? 눈총이라는 단어에 왜 '총'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지를.

곧 우리 엄마가 될 새엄마와 함께 우리 집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는 일도 즐거웠다. 새엄마는 과일을 예쁘게 깎는 사람이었다. 김치도 예쁘게 썰고 음식도 예쁘게 담았다. 옷도 예쁘게 입고 머리도 단정했다. 내게 그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고 동경이었는지. 그러나 우리가 가족이 된 후 모든 것은 변해갔다. 모든 것이 송두리째 변해간 것이다. 우리가 가족이 되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 후로도 나는 가끔 생각해보곤 했다.

날을 떠올리는 것은 이제 그것을 실천으로 옮길 때가 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이제부터 엄마에게 가서 살겠다고 했을 때 수화기 저쪽에서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아빠는 아마 집필실 책상에 놓인 담배를 찾아 물고 있을 것이었다. 내가 떠나고 난 후, 어쩌면 아빠는 "실은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딸을 보내는 연습을 매일 했었다"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글을 쓸지도 모른다. 엄마와 함께 살 때 엄마를 보내는 연습을 하지 않았던 것을 아빠는 오래도록 후회한 거 같았다. 물론 아빠 입으로 내게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빠가 내게 엄마에 대해 말한 일은 거의 없었다. 엄마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내게는 처음부터 금기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알게 되어버린 것이다. 아빠는 엄마에 대해 그것이 무엇이든 지독하게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어느 날 문득 어린 나를 붙들고 "위녕, 아빠는 너를 낳은 것은 절대로 후회해 본 적이 없어"라고는 말하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아빠가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날 낳은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엄마도 그렇게 하라고 했니?"

내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자 아빠가 물었다.

"응, 엄마가 사는 B시의 학교로 전학수속도 하겠다고 했어."

내가 뉴질랜드에서 돌아온 이후로 아빠는 좀 변해 있었다. 내가 말을 할 때마다 반 박자씩 쉬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아빠는 내가 뉴질랜드에서 도망쳤듯이 다시 또 아빠로부터 도망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그건 아니라고 말하면 아빠는 알아, 하고 대답하겠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차마 생각을 추스르기도 전에 온몸으로 그렇게 느껴버릴 것이었다.

그날, 뉴질랜드를 떠나기 전 그 부딪힘을 생각하자 마음 한 켠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빠가 내 앞에서 말을 잃어버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끔찍한 말을 했는지 깨달았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아빠도 나도 서로에게 16년 동안이나 참고 하지 않았던 말들을 해버린 것이다.

"어쩌면! 어쩌면! 이렇게 네 에미를 닮았니!"

"그래? 그렇다면 나도 이젠 알겠어. 이러니까 엄마가 도망갔지!"

그때 아빠의 눈에서 이상한 빛이 번쩍 일어나더니 이내 꺼져버렸다. 그리고 아빠는 서재 의자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빛이 번쩍이다가 꺼져버린 아빠의 눈빛을 내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있을까. 아빠는 잠시 웅덩이 같은 데 빠진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꼼짝 않은 자세였지만 언뜻 허우적거리고 있는 듯도 했다. 가뜩이나 긴 아빠의 팔은 의자 팔걸이에 젖은 빨래처럼 걸쳐져 있었다. 아빠는 다시는 그 의자에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세상의 모든 성곽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빗소리였던가. "위녕…, 엄마가 아빠로부터 도망갔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니? 지금껏 그래왔니?"

아빠의 커다란 갈색 눈동자는 멍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아빠와 나는 결별했다. 아빠와 나는 다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그때 서로 알았다. 아빠에게 도망치기 위해 싸우는 상황이었고, 엄마에게로 가겠다고 그러니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중이었지만 이미 그런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그 순간, 그건 이미 장소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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