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용의 도살자」로 악명 떨쳐/나치전범 바르비 옥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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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불 레지스탕스 4천여명 살해
나치전범으로 프랑스 리용교도소에 수감중이던 클라우스 바르비(77)가 25일 지병인 혈액암으로 사망했다.
프랑스 사람들 사이에서 「리용의 도살자」란 악명으로 잘 알려진 바르비는 지난 87년 프랑스 전범재판소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리용교도소에서 복역해 왔다.
2차대전 당시인 1942∼44년 프랑스 리용지역 독일게슈타포(나치비밀경찰) 책임자였던 바르비는 프랑스계 유대인 7천5백여명을 아우슈비츠 유대인 집단수용소로 보내고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 4천3백여명을 살해,프랑스인들의 원한의 표적처럼 돼 있었다.
독일패전과 함께 남미 볼리비아로 피신,철저한 은신생활을 해오던 그가 정체를 드러내게 된 것은 지난 71년. 프랑스의 「나치사냥꾼」으로 유명한 비트 클라스펠트가 10여년에 걸친 끈질긴 추적끝에 볼리비아에서 그의 소재를 확인해 냈다.
그러나 볼리비아정부는 이미 볼리비아 국적까지 취득,어엿한 사업가로 행세하고 있던 바르비를 프랑스에 인도하길 거부,프랑스 정부는 그를 넘겨받기 위해 그후 10년에 걸친 밀고 당기는 외교협상을 벌여야 했다. 볼리비아가 바르비인도를 거부한 배경에는 미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프랑스 사람들의 믿음이다.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2차대전 종전과 함께 미 육군방첩대는 바르비를 체포,그를 비밀정보원으로 이용했고,그 대가로 바르비를 볼리비아로 빼돌려 보호해 왔다는 것이다.
결국 지난 81년 프랑수아 미테랑 사회당정권이 들어선 이후 양국간에 양해가 이뤄져 볼리비아정부는 지난 83년 2월,바르비를 프랑스에 인도했다.
바르비는 프랑스 송환 즉시 자신이 게슈타포 책임자로 수많은 프랑스 사람들을 고문,학살했던 바로 그 장소인 리용교도소에 수감됐으며 그로부터 만4년에 걸친 긴 재판이 시작됐다.
당시 13세 소녀로 게슈타포에 끌려가 그에게 직접 고문을 당했던 노부인이 증인으로 나오는 등 충격과 흥분속에서 진행된 이 재판에서 그는 조금도 반성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아 프랑스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자신이 피고로 법정에 선 것은 독일이 패전했기 때문이라는게 그가 표명한 일관된 신념이었다. 결국 그는 프랑스 사법사상 유례 없는 「인류에 대한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파리=배명복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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