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최병렬 대표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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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늘로 대표님의 단식 나흘째입니다. 한끼만 굶어도 어질어질한 게 보통 사람입니다. 예순을 넘겨 일흔을 바라보는 연세에 오죽했으면 곡기를 끊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없지 않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러나 제 눈에는 그게 '쇼'로 보입니다. 정치란 게 다 그런 게 아니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 상황은 그 정도로 한가롭지 않습니다. 국회에서 시급히 처리해야 할 안건이 1천2백건이라고 합니다. 대표님의 단식 항거와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 의원들의 등원 거부는 국정을 볼모로 한 정치쇼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습니다.

대표님께서 단식에 들어가던 날 실시된 여론조사가 민심을 말해줍니다. KBS와 MBC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이 특검법안을 거부한 것은 잘못'(50.4~54.6%)이라는 응답보다 '한나라당의 전면 원외투쟁은 잘못'(67.1~71%)이라는 응답률이 훨씬 높았습니다.

"나라를 거덜내고 국민을 못살게 하는 대통령의 행태를 제1당 대표로서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 대표님의 설명입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단식이고 파행 국회입니까? 의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제1당의 선택이 그 수준밖에 안 된다는 현실이 절망스럽습니다. 왜 당당하게 정공법을 택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잘잘못을 떠나 특검법을 거부한 것은 헌법에 정해진 대통령의 권한입니다. 그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면 법에 정해진 대로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민주당과 자민련을 설득해 재의결을 추진하는 것이 거대 야당의 당연한 선택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걸 마다하고 전면 원외투쟁을 택했으니 이런 저런 말들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를 방해하기 위한 술책이라느니, 총선을 앞두고 당내 장악력 강화를 위한 술수라느니, 정기국회에 이어 임시국회를 바로 열어 방탄국회로 삼기 위한 꼼수라는 등 여러 가지 해석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표님의 선택은 직무유기이며 국정파탄 행위입니다. 盧대통령으로부터 '제1당의 불법파업'이란 조롱을 들어도 변명할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이라크 파병 문제에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정치개혁, 3백60만명의 신용불량자 문제에 이르기까지 쌓여 있는 국정현안을 팽개친 채 죽기살기로 싸움박질이나 하고 있는 정치권에 국민은 신물을 내고 있습니다.

참여정부 들어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습니다. 국민은 희망을 잃고 있습니다. 제1당인 한나라당의 역할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럴 때 대표님께서 당략은 당략이고, 국정은 국정이라는 책임있는 태도를 보여준다면 국민은 한나라당을 다시 볼 것입니다. 그것 이상 효과적인 총선 전략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대표님께서는 盧대통령의 재신임 승부수에 대한 미숙한 대응을 시작으로 그동안 계속 악수(惡手)를 거듭해 왔습니다. 한번만 더 생각하고, 민심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악수를 반복하는 그런 정치적 무감각의 배경이 무엇일까요. 권력에 대한 집착 때문 아닐까요.

화염병까지 난무하는 노동계의 강경투쟁 때문에 한국의 국가 이미지가 실추되고 있다고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CNN과 NHK에 비친 대표님의 단식하는 모습이 우리의 국가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생각해보지 않으셨습니까? 과거로 회귀하는 퇴행적 이미지가 대표님이 바라는 우리의 모습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서 국회로 돌아가 산적한 국정 현안과 씨름하는 책임있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대표님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배명복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