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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공소시효 끝난 범인 활보한다 생각하니 끔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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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1991년 유괴살해된 고 이형호군의 아버지 이우실씨. [사진=프리랜서 김성태 기자]

"형호 보내던 영안실에서 소주 한 박스를 마셨어요. 담배 한 보루를 안주 삼아. 취하려고. 그런데 안 취하더라고요."

1991년 3월까지는 술.담배를 일절 못하던 그였다. 이우실(52)씨는 16년 전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어제 일 같다"고 했다. 그는 영화 '그놈 목소리'의 실제 주인공인 고(故) 이형호군의 아버지다. 영화는 그해 1월 29일 발생한 이형호군 유괴사건을 다룬 실화극이다. 이우실씨를 7일 오후 대전 시내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형호군 얘기를 꺼내자 "우리 아들은 겨우 아홉 살이었지요. 꽃도 한번 못 피워 보고. 남의 손에 테이프로 꽁꽁 묶여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건 당시 36세였던 그도 이제 장년이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죠"라면서도 "세월이 약이라고 분노와 회한은 그래도 많이 엷어졌다"며 한숨을 쉰다.

그러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목소리는 범인 얘기가 나오면서 떨렸다. "제 얼굴, 인적사항 감추지 말고 그대로 다 내 주세요. 범인이 볼 수 있게"라며 사진 취재에 응했다. "범인을 만나면 왜 우리 애를 선택했고, 왜 죽였는지 묻고 싶습니다"고 힘주어 말했다.

유괴사건의 충격으로 형호군의 가정은 변했다. 44일간 범인의 협박전화를 기다리고, 범인이 시키는 대로 서울 여기저기를 조리돌림 당했던 형호 어머니는 당뇨를 앓고 있다. 집에 낯선 사람이 방문하면 없는 체할 만큼 사람을 두려워한다. 형호군은 2남 중 차남으로 범인은 "형호만으로 안 된다면 장남(당시 11세)도 납치하겠다"고도 협박했었다. 그간의 생활을 들었다.

-16년이 지났는데.

"세월이 어떻게 그렇게 갔나 싶다. 내 나이 먹는 건 생각 않고 형호가 꼭 있는 것 같다. 지나가는 것 같고."

-형호를 잃은 뒤 주위 사람들과는 어떻게 지냈나.

"주위에 계속 죄를 지었다. 그놈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목소리가 들리면 '혹시' 하고 자꾸 의심하게 되더라."

-가족과 주위 사람들 고생도 심했을 텐데.

"나와 관련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경찰 조사를 받았다. 우리 집에 찾아 오는 손님들도 예외가 없었고. 그러니 누가 나에게 연락하고, 찾아오겠나."

-생업에 어려움은 없었나.

"부친에게 물려받은 피혁사업을 그 뒤 6년간 계속했지만 인간 관계가 그렇게 안 되는 상황에선 결국 엎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생활은.

"부친 권유로 대전에서 삼계탕집을 개업했다. 사람 보기가 싫어 5년간 주방에만 처박혀 있었다. 지금은 건설 관련 일을 하고 있다."

-경찰 수사는 어떻게 받았나.

"당시 듣기론 서울 시내 강력계 형사들이 900여 명이라더라. 그 사람들 다 만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형호 얘기 할 때마다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지만 범인 잡는 일이라 최대한 협조했다."

-지난해 공소시효가 만료됐는데.

"범인이 공소시효 소멸로 자유인으로 돌아가 활보하고 다닌다는 건 생각하기도 싫다."

이우실씨는 범인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네가 지금 이 순간이라도 죄의식을 갖는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와서 사죄하면 용서하겠다"고. 형호군에겐 "아빠와 다시 만날 때까지 좋은 데서 행복하거라"고 말한 뒤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대전=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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