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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진희씨<재일 사학자>|지워진 벽화 속 사슴|만주 집안 벽화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고구려사 연구자인 재일 사학자 이진희씨가 최근 만주지역 고구려유적을 탐사한 뒤 역사현장을 담은 글을 기고해 왔다. 이씨는 지난5월 일본인 사학자 20여명을 이끌고 고구려의 옛 도읍지인 집안과 환인지역을 답사했다. 집안은 광개토대왕 비와 장군총 등 가장 많은 고구려유적이 남아있는 도읍지(국내성)며, 환인은 고구려가 만주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출발점으로 국내성 천도 이전까지의 도읍지다. 이씨는 유적답사와 함께 중국-북한간 국경인 압록강 풍경도 둘러봤다. 【편집자주】
5월초 고구려의 옛 도읍 집안은 밝고 활기찼다.
진달래와 배꽃이 만발한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젊은이들의 표정이 생기에 넘쳐 활기찬 분위기였다. 인구 6만명의 국경도시까지 개방의 물결이 스며들어 6년 전과는 판이한 느낌이었다.

<적석총 주인 궁금>
장군총 앞에도 6년 전 중국군이 주둔해 살벌한 분위기였는데 이제는 군 막사마저 폐허로 변해있었다.
장군총은 밑변이 약3l·6m, 높이 12·4m의 거대분으로 직육면체 화강암을 7층으로 쌓아올렸다. 기저에 놓인 화강암은 한개 무게가 30t이며, 위로 올라가면서 각 층의 높이를 조금씩 낮게 함으로써 안정감은 주지만 쳐다보는 사람들을 위압하는 마력을 지녔다.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였던가. 누구나 궁금해하는 의문이지만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도굴된 지 오래되며 유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장군총을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는 비가 이 무덤으로 가는 길가에 위치하고 있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대왕릉에서 「원태왕릉안 여산고여악」이라고 새긴 전(벽돌)이 출토된 것을 근거로 이를 광개토대왕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그 대왕릉은 파괴되었으나 기저의 한쪽변 길이는 장군총의 배 가까운 60m나 되었었다.
집안에 있는 대왕릉이나 장군총·임강총·천추총은 모두 왕릉급의 거대한 적석총이다. 주인공이 어느 왕인가의 논의도 중요하지만 이들에 대한실측과 발굴조사에 필자는 더 큰 관심을 돌린다. 중국측과 국교가 맺어지면 광개토왕릉비와 함께 공동조사가 가능할 것이라 기대된다.
동경을 떠나기 전 이미 약속은 되었지만 벽화고분 몇 기를 공개해줄 지는 알 수 없었다. 사전에 요청한 것은 오괴분 5호기와 무용·각저의 두 무덤, 그리고 통구사신총이다.
우리들은 공개되고 있는 오괴분 5호기를 먼저 찾았다. 필자로서는 6년 전과 작년 9월에 이어 세 번째였다.
오괴분은 5기가 일렬로 나란히 서있는 집안 최대의 봉토 분들이다. 5호기는 가장 동쪽에 위치, 봉분의 폭이 약50m며 석실은 지하 3·4m에 설치되어 있다. 벽화보존을 위해 입구에 사각형의 큰방을 만들었으며 다시 1자형의 통로가 첨가돼 있다. 이 정도의 추가 시설로도 벽화보존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안료 떨어져나가>
석실에 들어가 북벽에 그린 현무가 전등 빛으로 드러났고 일행은 『와!』하는 환성을 올렸다. 동벽의 청룡, 서벽의 백호가 남쪽 입구를 향해 달려들 듯한 자세로 그려져 있고, 남벽에는 주작 두마리가 통로를 지켜보고 있다. 사신들은 연속되는 연화화염문을 밑바탕으로 그려져 있어 타오르는 불꽃 속을 날고있는 것 같기도 하다.
청룡을 예로 세부를 살펴보면 머리를 쳐들고 크게 벌린 입으로는 붉은 혀를 휘두르며 사지를 앞뒤로 벌려 뛰고있다. 녹색의 머리에는 누런 색의 뿔이 솟아있고 몸체는 황·녹·다의 3색으로 채색했으며, 묵선으로 윤곽을 그렸는데 그 솜씨가 대단하다. 천장에는 용과 호, 일신과 월신, 신선과 비천 등이 그려져 경탄을 자아냈다.
오괴분 5호기에 이어 통구사신총을 견학했다. 우리 일행을 위해 철제 문짝을 용접기로 절단해 석실 안으로 안내해 주었다. 오랫동안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쇠가 녹슬어 있었던 것이다. 집안박물관에 5년간 근무해온 직원도 처음 참관한다면서 우리들 뒤를 따랐다.
이 벽화분은 오괴분 4호기의 북쪽 50m거리에 위치, 한쪽변 길이 27m의 규모로 1935년에 발견되었었다. 벽화의 시기는 오괴분 5호기보다 50년 정도 빠른 6세기 중엽임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1935년 촬영 사진을 지참, 벽화의 손상도를 점검했다.
장방형의 화강암을 쌓아올려 사벽을 만들었는데 스며들어온 빗물로 화강암 틈에 바른 안료가 거의 다 떨어져나갔다. 벽화의 보존을 위해 우선 빗물 침투를 막는 시설이 시급했다.

<두 여인도 없어져>
오후에는 대왕릉 가까이에 있는 무용총과 각저총을 참관했다. 두 무덤은 한쪽변 25m의 크기로 나란히 서 있다. l935년 발견이후 고구려시대의 의복과 생활상·신앙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유명하다. 1960년 초 중국당국이 벽화훼손을 막기 위해 비닐을 칠한 이후 보존이 잘돼 왔다고 한다.
그러나 1935년 촬영 사진과 비교할 때 파손도가 엄청나게 심하다. 각저총의 경우 북벽의 주인접객도의 인물 그림이 절반이상 떨어져나가 버렸다. 무용총의 수렵도는 사슴 두마리가 형적을 감추었고, 무용도는 5명의 남녀가 춤추는 모습인데 남자 한사람의 얼굴과 여자 두명의 의상을 알 수 있는 정도다. 우차의 모습은 겨우 유지하고 있으나 동벽의 음식 나르는 두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림을 그린 붓 솜씨에 경탄하고 있지만 필자는 안타까움으로 한숨만 나왔다. 고분 안에 가정용 방습기 하나씩 장치하고 석실 입구에 ㄱ자 통로를 첨가해 목제 문을 두개 정도 설치했다면 이렇게 심한 손상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집안의 고구려 문화재에 대한 관리책임은 물론 중국측에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민족문화의 원류를 연구, 발전시키는데 불가결의 보배다.
집안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남북학자, 중국학자 공동조사와 벽화 등 기타 유적들의 보호를 위한 모금운동이라도 벌여야할 것이다. 【이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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