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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36. 가장 역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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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1955년 서울 종로에서 명동으로 옮긴 의상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1953년 나는 형부가 소유한 서울 종로 네거리에 있는 빌딩 아래층으로 부티크를 옮겼다. 번화한 거리여서 지나가는 사람들도 내 부티크로 종종 들어오게 되었고 나는 처음으로 일반 손님들을 상대하게 되었다.

어떤 남자 손님은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들어와서는 앉아 있는 내 치마를 우산대로 쳐들며 "이런 거 있어?"하고 묻기도 했다. 어떤 여자 손님은 주문한 옷을 찾으러 남편과 같이 와서는 느닷없는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이것저것 트집을 잡아서 판매원을 괴롭히다가 종국에는 옷값을 깎으려 들었다. 이런 일이 애초부터 계획적인 수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종로 시절에는 어머니가 점심 준비와 회계를 맡으셨다. 이때부터 나는 돈 구경이라고는 할 수 없게 되었다. 부티크 바로 근처에 한일관이라는 식당의 장국밥이 유명하다했지만 단 한번도 사먹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목돈을 만들기 전까지는 무엇보다도 근검절약이 최우선이라 하셨다.

그런데 어느 날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위암 판정을 받고 앞으로 6개월이라는 시간 밖에는 사시지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수술실에 들어가셨지만 의사들은 이미 말기에 다다른 아버지의 환부에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어서 그대로 닫아버렸다고 했다.

나는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내가 가장 하기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미국에서 돌아와 그 때까지 복잡한 전차를 타기 싫어 택시를 탔었다. '그렇다. 이제 매일 택시 값을 아껴 전차를 타는 대신 그 돈으로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음식을 사드리자.'

나는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일식 요리며 중식 요리를 퇴근할 때마다 들고 병원을 찾았다.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의 식사 양이 줄어가는 게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떤 때에는 퇴근하자마자 부엌으로 들어가 나름대로 양식 코스 요리를 직접 만들어 드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명자야, 음식 맛도 좋고 네가 요리하는 모습도 보니 더욱 좋구나. 너의 정성이 일품이다"하고 기뻐하셨다.

어느날 아침 문안을 드리는데 아버지가 내 손을 잡으시더니, "명자야, 참으로 미안하다. 너에게 모든 짐을 지우고 떠나게 되었으니. 네 어머니는 몸이 불편하고 동생들은 다 어리니 모든 책임을 너에게 부탁할 수 밖에 없구나"

나는 그때 아버지께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속을 반세기가 넘도록 지켜왔다. 소학교 시절 선생님께서 아버지 없는 아이들은 손을 들라고 하면 아이들 몇몇이 고개를 푹 숙이고 팔을 드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없는 사람도 있나 하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우리 동생들이 그 신세가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버지의 5일장을 마치고 바로 다음 날 나는 검정색 스커트에 검정색 블라우스를 입고 출근했다. 그날부터 나는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일곱 동생들을 책임져야 할 가장이었다. 내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노라 ·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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