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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8)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33)|이용상|고국이 그리운 사람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언젠가는 꼭 알고싶었던 사실이었지만 내가 김통역에게 왜 일본군 통역을 했느냐고 물었던 것은 큰 잘못이었다. 나는 이역만리에서 단 둘 뿐인 사이가 서먹해지지 않을까 후회도 하고 걱정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타고난 천성인지 명랑하기만 했다. 나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일본군 무장해제가 끝난 지 얼마 후 사단교육대 에서는 총기조작법강습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으로부터 접수한 총기의 다루는 법을 일본병기장교가 중국군 장병에게 가르치는 교육이었다. 김통역은 그 통역 때문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내가 그를 돕지 못한 것은 정밀한 최신무기를 다루는 고도의 중국어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는 좁은 논길을 아슬아슬하게 말을 몰며 질풍 같이 숙소로 달려왔다. 말에서 뛰어내린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동지, 이동지. 저기 조선사람이 있어요. 어서 갑시다』고 했다.
그는 강습소 일을 끝내고 돌아오다가 길가에 있는 소금공장담벼락에 「여기 조선사람 있습니다」라는 글이 크게 씌어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고향 수천리, 중국 벽지에서 동포를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반가운 일이더냐. 두 사람은 소금공장으로 말을 몰았다. 이 지방은 바다와 수천리 떨어진 곳이어서 지하 수백척을 뚫고 진흙을 파내 햇볕에 말려 소금을 만들고 있었다. 거기에서 우리는 쭈그리고 앉아 장기를 두고 있는 두 청년을 보았다.
우리들은 한눈에 조선동포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몇년만에 동포들을 보자 금세 눈물을 글썽이며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문기찬과 박창수, 그들의 고향은 평양과 신의주. 갑자생으로서 징병에 끌려왔다가 탈출, 중국유격대에서 복무하던 중 8·15를 맞이했고 그들이 소속해 있던 유격대는 전방치안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곳 소금공장을 병영으로 쓰고 있는 터였다.
곧 나타난 젊고 씩씩한 탄(담)이라는 유격대장이 『조선동지들 때문에 일본군을 눈앞에 두고도 습격을 못했습니다』고 껄껄대며 웃었다. 『그럴리가…』하며 내가 의아해하는 것을 보자 대장은 『그 부대에는 조선인병사가 열 명이나 끼여있었거든요. 그들이 다칠까봐 이 두 동지가 공격을 못하게 한 겁니다.』
조선사람이 다칠까봐 공격을 말린 측이나 그런 부탁으로 공격을 하지 않았던 유격대나 똑같이 물렁한 전사일 수밖엔 없었다. 그러나 김통역과 나는 그 상황을 잘 모르는 이상 더 캐
물을 수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한동안 다른 얘기로 시간을 보낸 뒤 대강의 양해를 얻어 두 사람을 데리고 거리로 나았다.
우리끼리 실컷 마시면서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술과 고기를 청해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통역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박창수 동지, 조선사람이 다칠까봐 일본놈을 공격하지 못하게 했다는 아까 그 유격대장의 말은 뭣이지요?』『네, 왜 그랬느냐 하면 그 일본부대는 바로 전에 내가있던 경비부대였지요. 거기에는 원래 조선사람이 나와 여기 있는 문동지 까지 모두12명이었는데 다 같은 고향사람들이었어요. 나는 같은 일등병이지만 분대장 대리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탈출전날 조선사람들에게 수영을 하자며 모두 강가로 나오라고 했지요. 그리고 다같이 탈출하자고 말했습니다.
탈출하자는 것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지요. 그런데 평소 큰소리를 치던 사람들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겁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나는 문동지와 둘이 떠날 터이니 이 비밀을 24시간만 지켜달라」고 부탁했지요. 그들은 약속을 잘 지켜 주었습니다. 즉 우리 두 사람을 살려 준거나 다름없었지요』
『네, 잘 알겠소. 그래서 그 답례로 공격을 못하게 했단 말입니까?』
네사람은 한바탕 크게 웃었다. 고향 떠나 수천 수만리, 아직 어린 스무살짜리 우리들이었다. 우리는 그날 밤의 기쁨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나는 다음날 왕 참모장에게 그들을 데려오자고 상신 했다. 그 소망은 즉석에서 이뤄졌다. 김통역이 옴으로서 이제 네사람으로 된 것이다.「만세, 만만세!」였다. 【이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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