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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 놓고 호미 든 늦깎이 농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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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농업도 정보.통신 산업 못지 않게 중요한 분야입니다. 생산비를 낮춘 품질좋은 쌀로 수입 농산물을 줄일 수 있다면 국부 창출도 가능해요."

경남 마산 수출자유지역에서 휴대전화를 만드는 ㈜노키아 티엠씨 이재욱(66.사진) 전 회장이 농부로 변신했다. 그는 2003년 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마산시 진북면 명학리 학동마을에 정착했다.

10여년 전에 사 둔 950평 논의 한 켠에 집을 짓고 쌀 농사를 시작한 것이다. 자택에서 만난 그는 18년 간 외국계 기업 CEO라는 화려함을 뒤로 한 채 작업복에 모자를 쓰고 마늘밭을 돌보고 있었다. 그냥 시골 농부였다.

서울대 공대 출신으로 1986년 적자투성이였던 회사를 맡은 지 3년 만인 89년 5000만 달러 수출을 시작으로, 3년마다 1억 달러, 5억 달러, 10억 달러, 20억 달러 수출탑을 받을 정도로 경영 수완이 뛰어났다.

그랬던 그는 2000년 말 인후암에 걸리면서 '인생 2막'을 농부로 열 것을 결심했다. 농부 이영문(53)씨가 쓴 '모든 것은 흙 속에 있다'라는 책을 만난 것이 계기였다. 볍씨를 직접 파종한 뒤 농약과 비료를 뿌리지 않는 친환경 농사법을 접한 것이다.

주말과 휴가 때마다 농사 실무를 익혀오다 은퇴 이듬해인 2004년 첫 농사를 지었으나 실패였다. 하지만 다음해 기존 농법의 90%에 이르는 수확을 올렸다.

새로운 기술도 찾아냈다. 어린 잡초를 물에 잠기게 해 죽이는 '잡초 수장(水葬)법'이다. 볍씨를 뿌린 뒤 3~4주 논물을 넣지 않다가 잡초가 어느 정도 자랐을때 물을 1주일쯤 채워 두면 잡초들이 생장력을 잃고 시들해 지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주변의 버려둔 논을 빌려서 재배 면적을 4000여 평으로 늘렸다. 관리인 한 명만 두고 파종에서 수확까지 본인이 직접 한다. 수확한 쌀은 주변의 사람 100여명에게 무료로 나눠준다.

이 전 회장은 "앞으로 30년은 더 살 것으로 보고 농촌에 부자가 많아지도록 제 2의 인생을 농촌에서 펼 생각"이라며 "열심히 살았던 과거도 보람있었지만 앞으로의 인생에 더 많은 기대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서해안 간척지 1만평을 사들여 자신의 농법대로 벼농사를 지을 계획이다. 매년 100여 명의 농촌 학생들에게 1억여원의 장학금을 주는 사업도 은퇴 직후부터 펴고 있다. '인생 2모작'을 차근차근 진행 중인 것이다.

글·사진=김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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