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시 개발 정보 공무원이 빼돌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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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경제부처에서 근무해 온 공무원이 정년퇴직을 하루 앞두고 엉터리 정책 결정과 기밀 정보 유출 등 공무원들의 부끄러운 단면을 강하게 비판하는 책을 펴냈다.

저자는 산업자원부 무역위원회 산업피해조사팀에 근무하는 이경호(59.사진) 서기관. 이 서기관은 28일 출간한 '과천 블루스'(지식더미)라는 책에서 자신의 관직 근무 경험을 일지 형식으로 정리하면서 관가에서 벌어지는 부정부패 사례와 부조리 등을 비판했다.

책에서는 1981년 컬러 TV 시청료 책정 당시 주무를 맡았던 저자가 적정 가격이 1100원이라는 의견을 올렸으나, 한국방송공사(KBS)의 집요한 로비로 결국 2500원으로 결정되는 과정 등이 소개돼 있다.

부동산 개발 정보가 마구잡이로 새나가는 상황을 그린 장면도 있다. 저자는 건설교통부 장관이 판교신도시 개발 계획을 내놓던 날, 동료 사무관에게서 건교부 직원들이 이미 5년 전에 판교 땅을 사들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건교부가 택지 개발을 위해 산하 연구기관을 통해 용역보고서를 받는 과정에서 개발 정보가 퍼지고 직원들은 이 정보를 친인척에게 알려줬다는 것이다. 이런 신도시 개발 용역 보고서는 5년 전부터 서울 강남의 부동산중개업소를 돌아다녔다고 저자는 주장했다.

현재 대대적인 수술이 추진 중인 국민연금 문제 또한 사실은 20년 전부터 이미 고갈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는 내용도 눈길을 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86년 국민연금이 2049년에는 고갈된다는 보고서를 청와대에 내면서 시행을 연기하자고 건의했으나, 노태우 당시 대통령 후보의 선거 공약이라는 이유로 강행됐다는 것. 저자는 기금 고갈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KDI는 이미 만들어진 기금 수입 모형에 수익률 변동치 등 숫자만 바꿔넣으며 향후 기금의 전망을 추정해 내는 연구 용역 보고서로 '불로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저자는 또 현 정부의 혁신정책에 대한 비판도 제기했다. 무역위원회에 근무하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대책에 골몰하는 자신에게 '혁신과제'를 요구하는 상황을 꼬집으면서 현 정부의 혁신 정책을 '우수마발(소의 오줌과 말의 똥) 혁신'으로 꼬집었다.

책에는 이 밖에 수백억원의 판공비와 출장비가 허위 공문으로 집행되는 모습, 200만원짜리 명패를 만드는 어느 차관의 행태 등이 소개돼 있다. 그는 "이기적인 고위 경제관료들이 퇴직 후 금융기관에 갈 것을 대비해 이들 기관의 고임금을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서기관은 76년 경제기획원 근무를 시작으로 재정경제부와 산자부 등에서 근무해 왔다. 그는 책 내용이 파문을 일으키자 해명 자료를 통해 "공무원 사회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다같이 썼지만 의도와는 달리 부정적인 면만 부각됐다"고 말했다.

그는 "책에서 언급했던 부정적인 측면들이 지금은 많이 사라졌으며, 과거의 부정적인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후배 공무원들이 앞으로 더욱 성숙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글을 썼다"고 했다.

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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