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선거(정치와 돈:4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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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유권자엔 돈 덜써 평균 3천만원선/후보상대 담합용 「거액지출」 새현상
시·군·구 기초의회선거 후보등록 마감날인 지난 13일 서울 D구의 한 동에서 막판등록한 H씨(40·의류제조업)는 이번 선거에서 5천만원가량을 쓸셈이라고 말했다. 그가 출마한 곳은 1명을 뽑는 지역으로 민자·평민·민주당원이 자기당적을 표방하고 나선 치열한 경합지역이다.
평소 정치권에 도덕성과 개혁의 새바람이 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막상 선거전에 뛰어들면 적지 않은 돈이 들 것이라는 걱정때문에 망설이다가 그 지역에서 20년간 살아오면서 닦아온 인간관계의 힘을 빌려 후보에 나서게 됐다고 한다.
동네 학교친구 50명과 오랜기간 해왔던 친목계 모임이 있었는데 이들이 뜻밖에 10만원씩 갹출해 5백만원을 대줄테니 뛰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H씨는 그동안 저축해둔 돈과 친지등의 도움을 빌려 5천만원을 마련해 선거운동을 해오다 선거날이 임박해 대충 계산해 보니 2천5백만원 정도밖에 안쓴 것을 발견하곤 놀랐다.
『선관위의 요청과 기관감시 등으로 소형인쇄물도 규정대로 세종류만 만들었고,선거운동원도 막상 뛰어보니 지역이 작아 혼자서도 유권자 대면접촉이 중분히 가능해 예상보다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선거운동이 처음 시작될때만해도 금품제공·향응성 대접이 또한차례 전국을 휘몰아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공안선거』라고 불릴 만큼의 철저한 단속과 엄포로 기초선거의 혼탁풍조가 외견상 나타나지 않은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따라서 지역에 따라 편차는 매우 크게 나타나긴 하지만 기초선거에서 후보들이 쓴 돈은 전반적으로 하향조정된다는게 일반적 관측이다.
특히 서울 선거구 4백94곳중 60%에 가까운 2백74개 선거구가 2인 선출지역으로 민자­평민당의 동반당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 지역의 여야소속 후보들은 당초 예상보다 적은 돈을 선거자금으로 지출하게 됐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자기지역구의 13개동 22명의 의원정수중 12명의 후보를 낸 관악을 이해찬의원은 각 후보가 15일 선거운동기간중 평균 3천만원 이상의 돈은 쓰지 않았다고 자랑했다.
▲선거사무소 임차료 1백48만원 ▲선거사무장·운동원 경비 6백70만원 ▲소형인쇄물·현수막·벽보 9백21만원 ▲자동차운영비등 1백만원 ▲후보자 품위유지비 1백47만원 ▲기타 사무용품 24만원등 2천1백만원정도가 선관위가 제시한 선거비용 상한선인데 이의원은 『상당히 합리적이고 현실화된 액수』라고 말했다.
다만 15일동안 후보의 품위유지비로 책정된 1백47만원은 하루 10만원꼴로 현실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최소한 30만원은 후보가 호주머니에 갖고 다녀야 순회장소마다 귤 한상자라도 전해주고 사랑방좌담회를 제공한 사람에게 3만∼4만원이라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품위유지비의 초과비용 3백만원(15일×20만원)은 인쇄물비용을 깎아 충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H씨와 이의원의 얘기는 선거를 치르는데 드는 최소한의 기본경비일뿐 음식대접·선물돌리기·표매수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계산법이다.
선거관계자들은 특히 지방으로 갈수록 향응을 바라는 유권자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기본경비에 2천만원에서 많으면 8천만원까지의 추가경비를 쓰는 곳이 많다고 털어놓는다.
대체적으로 4천만원에서 1억원사이를 후보들이 쓴다고 봐야한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서울 근교 K시에 민자당후보로 출마한 한 사업가는 『이번 선거에 2억원을 썼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경남 S군은 야당없이 친여후보끼리만 경쟁하는 지역이다. 후보조정과 과열경쟁방지를 위해 내려갔던 이 지역 국회의원의 보좌관은 『후보 서로가 잘 아는 지역특성상 선물·음식대접은 거의 보이지 않는 대신 직접적인 현금거래가 성한 것 같다』고 상황을 전하면서 『현금지급은 표나지 않고 확실한 표를 얻는 유일한 방법이나 철저한 선거감시 분위기에서 오히려 더 많이 애용되는 수법인 것 같다』며 『후보당 적어도 4천만∼5천만원은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유권자를 상대로 한 돈쓰기는 줄어든 대신 후보를 상대로한 담합용 거액지출이 늘어난게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신종 돈쓰기 양상」이다.
전북 고창에서 발생한 1억5천만원 제공약속사건이 단적인 사례다.
평민당후보가 매수증거 확보를 위해 민자당후보를 유도한 성격이 짙지만 이같은 추잡한 매수와 폭로전은 기초공동체안에서 지연과 혈연·학연이 얽히고 설킨 후보들간 경쟁에서나 볼 수 있는 특이현상이라는 지적이다.
여당간 후보조정은 물론 여야간 후보조정도 상당했는데 중앙당 차원에선 서로 이를 비난했으나 민주당 대구서갑지역의 한 후보사퇴자가 『괴롭다. 더 묻지 말라』고 한 사퇴의 변에 대해 주변에선 여당으로부터 「매수공작」이 분명이 있었다고 단언할 정도로 후보담합이 비교적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이 담합의 배후엔 물론 상당액수의 현금거래가 있었을 거라는게 정설이다
고창사건은 군의회의장을 노리는 민자당후보가 거액을 쓴 것이라는 평가이며 대체로 사퇴대가는 기탁금 2백만원을 포함,5백만원에서 3천만원 정도가 아니겠느냐는게 보통 거론되는 「시장가격」이다.
심지어 후보사퇴대가를 노리는 위장출마한 후보도 상당할 것이라는 소문도 정가에서 돌고 있다.<전영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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