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관생활 27년째 서울구치소 정성진 주임교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서울구치소 주임교사 정성진씨(54)는 교도관생활 27년째이지만 어느해보다 어수선하면서 한편 입맛 씁쓸한 연초를 보내고있다. 올들어 밍크코트 입은 부인들하며·평소 tv등을 통해 낯익은 국회의원들이 고급승용차에 실려 구치소를 하루가 멀다하고 드나드는 모습을 보면서 느낌이 직지 않은 것이다.>
올들어 큰 일이 참 많이 터지기도 했다. 예체능계대학 입시부정사건을 시작으로 뇌물외유사건이 뒤떠르더니 수서특혜분양사건이 잇따라 온 나라의 기축을 흔들고 있어 하얀 수의를 입은 이들 사건의 「주역」들을 매일 보아야 하는 정씨로서는 착잡함이 더할수 밖에 없는것이다.
『내 나이 54살이고 딱 반평생인 27년을 서대문형무소시절부터 서울구치소에시만 근무해 왔지만 올해처럼 사건많고 특히현역국희의원 8명을 한꺼번에 철창에 「모시는」일은 처음입니다.』

<격동기의 산증인>
정씨는 이들 구속자들이 민원이니 입학을 미끼로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챙겼다는 사실을 생각할때마다 평생을 음지에서 얇은 월급봉투로 버텨온 두 어깨에서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라고 했다.
『권력형 비리나 대형 경제범죄등 죄등 화이트칼러 죄수일수록 교도소 생황을 못견디고 쉽게 병이 납니다. 강·절도등 잡범들은 잡초같은 강한 생명력이 있는지 적응을 쉽게 하지요.』
정씨야말로 격동기 우리 현대사의 현장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산 증인.

<유명인사 거쳐가>
『현저동에 있던 서울구치소는 역사적인 거물들이 모두 거처간곳으로도 유명하지만 유물도 많아 문화재적인 가치도 있었어요. 예를들어 지하실에시는 강우규의사가 처형직전 손톱으로 나무바닥에 「강우규 사삼오이 일구이O, 십일 ,이구」라고 자신의 이름과 처형된 날짜를 단기와 시기로 나눠 정확히 파놓은 것이 86년에야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정씨는 70년대의 민청학련사건 관계자부터 80년대의 이철희·장영자부부 어음사기사긴·명성사건·5공비리관련사에 이르기까지 대형사건 관련 구속자 모두 자가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최근 남북문제가 거론되먼서 문익환목사·임수경양도 정씨가맡았다는 것.
최근에는 박재규의원·거규헌전장관등이 수용생활에 적응못해 큰 고생을 했습니다. 두분은 들어오자마자 우울증 비슷한 증세를 보이먼서 식사를 제대로 못하시더군요. 그러면서갑자기 건강상태가 거동도 못할 정도로 나빠져 안타깝게 느꼈습니다.』
정씨는 재소자 개인의 수용생활태도등을 말하기가 조심스럽다면서 망설였다. 그분들의 명예와 직결된데다 현재 사회에서모두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 오해를 살수도 있다는 것이다.

<장세동씨 모범적>
『문익환목사님은 조용하게 주로 책을 읽으며 견디셨지요. 다만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시다 갑자기 갇히게 되니까 답답해서인지 많이 편찮으셨습니다. 당시에는 노령이라 편찮으신줄 생각했었는데 형집행정지로 풀려난후 각종 집회에서 왕성하게활동하시는 것을 보니 나이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정씨는 특히 인상적인 재소자로는 안기부장·대통령경호실실장을 지낸 장세동씨를 손꼽았다.
『장씨는 특히 모범적인 재소자었습니다. 돈때문이 아닐텐데 사식은 절대로 안했고 늘 관식에 만족하는 표정이셨지요. 특히 규칙적인 운동을 하면서 말단교도관들에게까지 깍듯하게존댓말로 예우하는등 교도관들이 저절로 머리를 숙일 정도였습니다. 전경환씨도 모범 재소자였구요.』
정씨는 정치인등 일부 권력층에 있던 사람들은 교도관에게 반말을 쓰기 일쑤고 사식만 들며 행동도 안하무인격으로 하는 경우가 많더라고 했다.
정씨가 9급 교도공채시험을거쳐 교도관생활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65년9윌.
1·4후퇴때 월남강원도 철원태생으로 중학생이던 1·4 후퇴때 가족이 모두서울로 옮겨와 서울에서 법과대학을 졸업한 뒤 공군복무를 마치고 이 직업을 택했다.
『달리 마땅한 취직자리가 드물었고 나라에 봉사하고 싶어서교도관시험을 봤다』는 정씨는현재 8급교사직으로 만년 하위직에 머무르고 있는 셈.
8,9급 하위직의 근무상태를살피고 어려운 점이나 문제점들은 간부들에게 전달하는 일이주임무여서 누구보다도 이들의고충을 잘 알고 있다.
『교도관생활은 사실 「반징역살이」와 다름없는 격무입니다. 89년11월 근무세도가 2교대에서 3교대로 바뀌었지만 아직도다른 공무원의 주당 44시간 근로에 비해 시간이나 강도에서더 고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씨는 격무·신분상 불이익보다 교도관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교정기관과교정공무원들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그릇된 시각과 따가운눈총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특히 최근에는 학생·노동운동을 하다 구속된 재소자들과 교관들과의 잦은 다툼도 문제거리라는 것.

<힘드는 음지의 삶>
『70년대까지만 해도 양심수들은 이념 때문에 잡혀왔다는 이유로 교도관들로부터 동정과 존경을 받았지요. 민청학련사건으로수감된 이철씨(현국희의원)의경우 교도관들과 많은 얘기를나누며 정신적인 교류를 가져아주 친하게 지냈습니다. 태도도 아주 겸손했지요. 그러나80년대이후 최근에는 교도소 투쟁이 운동의 한 방법이나 수단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학생· 운동권 출신 재소자는 아주 까다롭고 젊은 교도관들과 감정충돌이 많은 것같아요.』
정씨는 교도소 규정상 재소자에게는 교도괸들이 평어를 쓰도록 되어있으나 학생들 중에는 경어를 쓰지 않는다고 대드는 경우까지 많다고 했다.
『뇌물수수니 가혹행위니, 간혹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교정시설내 어둡고 부끄러운 면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대다수 교도관들은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음지에서 성실히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줘야합니다.』
정년이 2년남짓 남은 정씨는 서울 신촌의 대지 33평까리단독주댁에시 부인(53)·세딸과함께 살고있다.
글 홍승일기자
사진 주기중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