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했던 37년만의 뱃길/한강하구 수로 항행 3박4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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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거센 소용돌이에 예인선 좌초/험로 피해 군사 분계선 넘기도
37년만에 열린 뱃길은 예상밖의 험로였다. 깊이와 흐름을 가늠키 어려운 물길 곳곳에 모래톱과 소용돌이가 「남북화해」의 험난한 여정을 상징하듯 선단을 가로막았고 선단은 소용돌이에 말려 1시간여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야 했다.
지난달 22일 첫 항행에 나섰다가 실패후 28일 2차 시도에서 성공,1일 고양군 사미섬 자유로 건설현장에 안착한 「한강 항해선단」의 분단이후 처음 한강하구 수로항해는 한편의 모험극이었음이 뒤늦게 확인됐다.
자유로 시공을 맡은 한진건설 영종도 현장소장으로 이번 항해를 총 지휘한 임영택씨(50)를 만나 「망각의 수로탐험」 3박4일을 들었다.
『예인선을 선두로 한 6척의 선단이 월곶을 떠나 30일 오후4시 김포군 폐암리 앞 4백m 되는곳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임진강과 한강물이 합쳐지는 지점이지요. 갑자기 두 강물과 강화도쪽에서 거슬러 오는 물까지 세군데에서 흐르는 물이 뒤엉키면서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습니다.』
앞서가던 예인선은 순간에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모래더미 위에 좌초하고 말았고 설상가상으로 『불이야』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배가 기우뚱 거리면서 전기 스파크로 일어난 불똥이 넘어진 석유난로에 옮겨붙어 배 안이 불길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빨리 소화기로 불부터 꺼라! 뒤에 있는 배에 알린다. 우리를 구조하려고 접근할 생각은 말라! 접근하면 우리 모두 죽는다.』
임소장은 선원들에게 지시하면서 핸드폰으로 뒷 배에도 접근금지를 지시했다. 오후4시50분.
간신히 불길을 잡고 배가 모래 언덕을 비껴났을때 임소장은 또 한번의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앞은 북측경계선에 가깝고 뒤로 가자니 소용돌이.
『선로를 북으로 돌려라!』
예인선은 군사분계선인 강 중앙을 벗어나 조심스럽게 북측으로 접근해 갔다. 북측 강변으로부터 불과 2백m,북측에서 사격을 가해올 경우 속수무책인 위급상황. 그러나 북측 초소에서는 이쪽을 감시하는 동정이 분명이 목격됐지만 끝내 총격은 없었다.
남북을 잇는 혈육의 끈,화해의 바람은 한강 하구에서도 일단 확인됐다. 『북쪽 초소를 향해 「고맙습니다」하고 소리를 질렀지요. 응답은 없었지만 가슴속에 뿌듯한 감동을 모든 선원들이 느꼈을 겁니다.』
임소장은 상기된 표정으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임소장의 선단이 좌초할뻔한 한강·임진강 합류지점은 유사이래 위험지대로 기록된 곳.
조선조때 지방에서 세곡을 실어나르던 조운선들이 숱하게 침몰,목숨을 잃은 애사가 서린 곳이다. 서산 안면도 수도·강화 손돌목과 함께 3대 위험지대로 꼽혀왔다.
『휴전 이후에는 이 항로를 다닌 적이 없기 때문에 지반상태와 수심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항행의 기본인 수심도 제대로 모른채 그야말로 모험을 한 셈입니다. 이번에 항해를 해보니 하상 변동이 심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임소장은 역사적인 항행을 계기로 우리 민족사와 애환을 같이해온 한강 수로가 다시 열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소장이 이끄는 준설선 두척 등 한진 종합건설 소속 작업선단이 인천항을 출발,2차 시도에 나선 것은 28일.
교동도에서 하룻밤을 자고 한강수로로 들어서 김포군 월곶과 전유리에서 다시 하룻밤씩을 잔뒤 고양군 지도읍 사미섬에 이르는 3박4일의 항해였다.
1일 오전 무사히 사미섬에 도착한뒤 임소장은 『50평생에 이번 항해같이 위험스런 모험은 처음이고 죽는줄 알았다』면서도 『역사적인 첫 항해를 지휘한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정선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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