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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2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김삼룡ㆍ이주하 체포 확실시/접선하러 갔다가 사장 행세로 검문통과
남북통일문제에 관해 우리가 작성한 보고서를 김삼룡에게 전달하기 위해 정태식과 나는 50년 3월27일 밤 동숭동 채항석의 집을 나섰다. 정은 검은 점퍼를 입고 검은 스키모로 눈ㆍ코ㆍ입만 남기고 얼굴을 감췄다. 나는 검은 오버에 영국제 신사모를 쓰고 일류신사 옷차림을 했다. 보고서는 깨알같은 글씨로 얇은 종이에 쓴뒤 다시 검은 종이로 싸서 봉하니 검은 바둑돌 보다 조금더 큰 정도였다.
처음엔 나의 양말속에 감춰봤으나 만약 체포되었을 때 뺏길 위험성이 있어 손에 쥐었다. 만일의 경우 땅에 떨어뜨리고 발로 밟아 없앨 작정이었다. 정태식과 나는 김삼룡이 지정해준대로 을지로 6가에서 신당동쪽으로 향하는 큰길로 가다가 사잇길로 들어갔다. 내 생각으로는 그쪽에 지하당 아지트가 많았기 때문에 김삼룡이 자기가 쓰는 아지트에서 보고서를 접수하고 우리로부터 설명을 들으려고 하는 것인가 추측되었다.
그러나 그가 지정해준 시간과 장소에 정확히 갔으나 김삼룡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 근처의 골목을 빙빙돌면서 김삼룡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시간은 점점 흘러 30분이 지났지만 김삼룡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와 정태식은 초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중요한 접선에 나오지 않을 리가 없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약속시간에서 50분이 경과되었을 때 나는 정태식에게 돌아가자고 제의했다. 그래도 정은 미련이 남아 있었는지 뒤를 쳐다보곤 할수없이 나의 뒤를 따라왔다.
나 역시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계바늘과 같이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김삼룡이 약속시간에서 5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신변에 무슨 사고가 생겼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태식이 접선시간을 잘못들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정과 나는 맥풀린 사람같이 묵묵히 돌아오는데 어둠속에서 별안간 『누구야,섯』하며 무장경관의 카빈총 총구가 나의 가슴을 찌르려는 듯 다가왔다.
우리는 피할수도 없이 영문도 모르고 손을 들었다.
수명의 무장경관은 이유도 말하지 않고 몸수색을 시작했다.
나의 양복주머니에서 큰 지갑을 뽑아낸 무장경관은 손전등으로 내용물을 비춰봤다. 지갑속에서 수만원의 지폐가 나왔다. 또 작은 지갑속에서는 나의 가짜명함과 임영신 상공부장관 명함,서울지방법원의 판ㆍ검사 명함이 나왔다.
이것들은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일부러 가지고 다니는 가짜 명함이었다. 무장경관은 처음보다는 공손한 태도로 『직업이 뭐요』하며 나의 신분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명함에 씌어 있는 대로요』하고 대답하니 『아,광산회사 사장이군요』하며 지갑을 나에게 돌려주었다.
나는 내뒤에서 몸수색을 당하고 있는 검은 스키모를 쓴 보잘것 없어 보이는 정태식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우리회사 사원이에요』하고 능청스럽게 정의 신분을 보증했다.
이렇게 해 나와 정태식은 비상검색을 무사히 통과했다. 그동안 나의 왼쪽 손은 기밀보고서를 꽉쥐고 있었다.
종로5가에서 혜화동 로터리로 가는 길에 들어서 나는 정태식의 승인을 얻어 손에 쥐고 있던 보고서를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발로 비볐다.
이화동 근처에 이르렀을 때 또다시 무장경관의 검색을 당했다. 여기서도 동대문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사히 검색을 통과했다.
동숭동의 아지트에 무사히 돌아와 보니 시간은 벌써 11시가 가까웠다. 우리가 갈때까지는 없었던 무장경관의 비상검문이 돌아올때 갑자기 시작된 것이 무엇때문일까. 오늘밤에 김삼룡이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은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우리는 걱정을 해봤으나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정은 나와 헤어지면서 내일 일찍이 정보를 수집,곧 보고하라고 했다.
그 이튿날 나는 하부조직에 비상지시를 내려 알아보니 지하당 최고간부 2∼3명이 체포당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당한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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