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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가사도 노동" 주부들『직업의식』높인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새 학기가 되어 아이들 환경조사 서를 쓸 때 엄마의 직업 란에「살림경영 가」라고 썼지요. 몇 년 전 만해도 빈칸으로 비워 두든 가 아니면 무직이라고 쓴 적도 있었어요. 직업을「살림경영자」, 또는「주부」라고 쓰고 보니 나 스스로도 당당함이 생기고 아이들도 신나 하더군요.』
결혼 후 20여 년간「전업주부」로 살아오다 최근 들어 살림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주부 이숭리씨(44)의 자신에 찬 목소리다.
직업이 뭐냐는 질문에 갑자기 주눅들린 목소리로『놀아요』『아무 것도 안 해요』, 심지어는『솥뚜껑 운전사지요』라고 말하던 여성들 대신에 『내 직업은 주부』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여성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이들은 파출부는 직업중의 하나로 간주하면서 이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주부의 일은 그냥 노는 것으로 간주하는 이제까지의 통념에 강한 거부의 몸짓을 보인다.
최근 여성단체「또 하나의 문화」가 동인지 6호로 퍼낸「주부, 그 막힘과 트임」도 이런 차원에서 주부들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문제를 제기한 한 예다.
『주부는 천직이며 가사노동은 사랑의 노동이라고 남편도 사회도 부추기고 예찬하지요. 그런데 실제로 문제가 생길 때 여성은 경제력이 없으니 남편의 요구에 복종하고 살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 그 동안 나는 뭘 하고 살았나 하는 회의가 마구 생기는 거지요. 나는 빈 껍데기인가 하는 자책도 하구요.』여성 민우회 주 부분 과장 유소림씨(39)는 주부들이 새삼스럽게 가사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선 배경을 이같이 설명하며 작년부터 개설한 민우 여성학교에 주부들이 몰려드는 현상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할 것이라고 풀이한다.
『좀 거창한 표현인지 몰라도 교육을 통해 내가 하는 가사노동이 우리사회를 유지, 발전시켜 나가는 역사의 두 수레바퀴 중 하나임을 인식하게 됐지요. 그런 다음에는 내가 보다 주체적인 모습으로 서야겠다는 용기가 생기더군요.』주부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은 뒤 새롭게 태어나는 느낌을 받았다는 임희경씨(53)는 살림이란「사람을 사람답게 살린다」는 말에서 유래된 말이라며 다시 한번 주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성 민우회나 주부아카데미가 그 동안 이같은 교육을 시켜 배출해 낸 주부의 수는 약 5백여 명. 그 외에도 평생교육원이나 사회단체의 강의를 통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된 주부까지 합치면 그 저력은 만만치 않다.
작년 말 개 정된 가족법에서 이혼 시 여성에게 재산분할청구권을 인정한 것도 주부들의 드높아진 목소리가 반영된 좋은 본보기.
『주부를 직업이라고 내세우니 오해하는 경우도 많아요. 내 남편만을, 내 자식만을 위하는 극단적인 가족이기주의로 간주하거나 여성에게는 주부가 가장 잘 어울리는 천직이니 취업경쟁에 가담하지 말고 일찌감치 현모 양처의 기법이나 배우라고 몰아붙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직업인으로서의 주부는·단순한 가정주부가 아닌 사회의식도 지닌「사회주부」를 지향하는 개념입니다.』
아직은 자신에게도 생소한 개념을 이제 막 정리하기 시작했다는 주부 구희숙씨(40)는 이제까지 한 가정 속에 소리 없이 숨어 있던 주부들이 자의든 타의든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드러내고 새로운 자리 매김을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 현상은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말한다. <문경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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