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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 부정… 뿌리 없는 나라 자초

중앙일보

입력

월간중앙우리 국사 교과서는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있다.
중국 동북공정의 원뿌리인 탐원공정의 노림수는 바로
이 대목이다. 고조선의 시초부터 바로잡자는 역사학자
이덕일의 쓴소리-.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영토침략으로 이어질 우려가 다분하다. 학문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주장은 여기서 비롯된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중국의 역사 침략에 분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과연 우리 내부적으로 문제는 없는지에 대해서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우리의 역사인식 체계에는 동북공정이 밀고 들어올 여지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최근 발표된 장비보(張碧波) 연구원의 ‘기자(箕子)와 기자조선’이라는 논문은 많은 시사를 한다. 이 논문은 “은(殷)나라의 기자가 한반도에 처음 기자조선을 세웠으며, 기자조선이 고구려·발해 역사의 시발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바로 단군을 생략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군을 빼고 기자부터 논리를 전개한다는 점이 우리로서는 의미심장하다. 단군조선이 바로 중국의 약점이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이 실재했다면 동북공정의 모든 논리는 기초에서부터 붕괴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과연 우리의 역사인식 체계는 단군조선을 실재했다고 믿는지 의구심이 든다. 한국사 연구의 주류 이론을 집대성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통해 문제를 살펴보자.

많은 국민은 국사 교과서가 단군을 개국 시조로 기술한 것으로 생각한다. 국사 교과서에 실제로 단군에 관한 서술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족장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 왕검이 건국하였다고 한다(BC 2333). 단군 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 고조선은 요녕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인접한 족장 사회들을 통합하면서 한반도까지 발전하였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의 출토 분포로써 알 수 있다. 고조선의 건국 사실을 전하는 단군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시조신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단군 이야기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승되어 기록으로 남은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어떤 요소는 후대로 가면서 새로 첨가되기도 하고 때로는 없어지기도 하였다. 신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이 반영되는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은 모든 신화에 공통되는 속성이기도 하다. 단군의 기록도 마찬가지로 청동기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등학교 국사, 34~35쪽)

국정 교과서의 이 기술을 언뜻 보면 마치 단군조선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 왕검이 건국하였다고 한다(BC 2333)”는 문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연 그런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 글은 <삼국유사>에 그렇게 적혀 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일 뿐 국사 교과서가 그렇게 인식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 그러한 내용이 실려 있으니 그 내용을 전할 뿐이라는 뜻이다.

이 교과서 내용 중 핵심은 “단군의 기록도 마찬가지로 청동기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쉽게 설명하면 청동기시대 때 고조선이 성립되었다는 뜻이다.

청동기시대에야 국가가 건국된다?

이 내용이 실린 국사 교과서의 중간제목은 ‘국가의 형성’이며, 그 아래 소제목은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다. 고조선이 청동기시대에 건국되었다는 뜻이다.

청동기시대가 된 후 국가가 세워진다는 것은 한국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독단이다. 이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단군조선을 부인하기 위해 창조한 이론인데, 한국 사학계의 주류는 아직도 청동기시대에야 국가가 건국됐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 교과서도 이런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한쪽에서는 단군에 대해 기술하고, 다른 쪽에서는 고조선은 청동기시대 때 건국되었다고 기술한다면 어느 쪽에 더 무게중심이 실려 있을까? 같은 국사 교과서 29쪽에는 “신석기시대에 이어 한반도에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서는 기원전 15~13세기경에 청동기시대가 전개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말은 결국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아무리 빨라야 기원전 15세기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말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 왕검이 건국하였다고 한다”고 남의 말 하듯 기술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기원전 23세기에 조선을 건국했다고 기록한 반면, 국사 교과서는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서는 기원전 15~13세기경에 청동기시대가 전개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이 만주지역에서 건국했다고 볼 경우 <삼국유사>와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 건국 시기에 관한 한 800년에서 1,300년의 간극이 생긴다. 고조선이 한반도에서 건국되었다고 볼 경우 무려 13세기의 차이가 생긴다. 따라서 우리 역사교육의 기초인 국사 교과서가 고조선의 건국이 <삼국유사>와 비교할 때 최소 800년에서 1,300년의 차이가 난다고 기술하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이것도 과거의 기원전 3세기 또는 8세기라고 주장하던 것에 비하면 많이 끌어올린 셈이다.

그런데 이 1,300년은 단순히 시간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사의 시작의 의미를 송두리째 뒤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 최초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자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일반 국민은 단순하게 고조선의 건국자는 단군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재 사학계 주류의 의견은 그렇지 않다. 고조선은 일반적으로 셋으로 분류된다. 이를 삼조선이라고 하는데,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이 그것이다.

국사 교과서에서 단군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단군조선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것 같지만 단군조선이라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기자조선도 마찬가지다. 삼조선 중에서 언급되어 있는 것은 위만조선뿐이다. 국사 교과서가 위만조선에 대해 어떻게 언급했는지 살펴보자.

“고조선은 요녕 지방과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면서 발전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에는 부왕·준왕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그 밑에 상·대부·장군 등의 관직도 두었다. 또 요서 지방을 경계로 하여 연나라와 대립할 만큼 강성하였다.”

그런가 하면 ‘위만의 집권’이라는 소제목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중국이 전국시대 이후로 혼란에 휩싸이게 되자 유이민들이 대거 고조선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고조선은 그들을 받아들여 서쪽 지역에 살게 하였다. 그 뒤 진·한 교체기에 또 한 차례의 유이민 집단이 이주해 왔다. 그중 위만은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위만은 준왕의 신임을 받아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 거주하는 이주민 세력을 통솔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하여 나갔다. 그 후 위만은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가 스스로 왕이 되었다.(BC 194)

위만이 철기문화 가져왔다는 근거는?

위만 왕조의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철기의 사용은 농업과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을 더욱 융성하게 하였고, 그에 따라 상업과 무역도 발전하였다.”(고등학교 국사, 35~36쪽)

국사 교과서에 처음 등장하는 고조선 임금의 이름은 부왕(否王)과 준왕(準王)이다. 이는 국사 교과서의 고조선사 인식체계가 혼동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우선 부왕과 준왕이 어디에 속해 있는 인물들인지 불분명하다.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부왕과 준왕은 단군조선에 속한 임금인가? 아니면 기자조선에 속한 인물인가?

바로 이 부분에서 국사 교과서의 모순이 극대화된다. 이해과목이어야 할 국사가 암기과목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런 부분들 때문이다. 고조선이 기원전 10~15세기에 건국되었다면 단군조선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 단군조선이 부인되면 그 자리는 기자조선이 채우게 된다.

기자는 중국 고대 은(殷)나라의 신하로서 걸왕의 정사에 대해 간쟁하다 투옥되었다는 인물이다. 그 후 주(周) 무왕이 은나라 걸왕을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건국하자 석방되는데, 폭군이었지만 자신이 모셨던 걸왕을 무너뜨린 주 무왕을 섬길 수 없다는 이유로 동쪽 조선으로 갔다는 인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자가 동쪽으로 가서 조선을 건국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쪽 조선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쪽 조선으로 갔다”는 것은 동쪽에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자 모순이 생겼다. 중국 기록에 위만이 조선 왕이 되기 전에 조선에는 이미 부왕과 준왕이라는 임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왕과 준왕이 단군조선을 계승한 인물인지 기자조선을 계승한 인물인지에 대해 국사 교과서는 아무 설명이 없다. 위만조선 이전에 부왕과 준왕이 있었고, 준왕이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겼다는 사실은 위만조선 이전에 이미 조선이 있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국사 교과서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모두 부인한 채 마치 위만조선만 실재했던 것처럼 기술한 것이다. 국사 교과서는 위만조선이 사실상 고조선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부왕과 준왕은 과연 누구인가? 부왕과 준왕의 정확한 재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중국의 <삼국지> ‘한(韓) 조’는 “부친인 부왕이 승하하고 준왕이 즉위한 지 20여 년 후에 진승(陳勝)의 난과 항우(項羽)의 기병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진승과 항우의 기병은 기원전 3세기경에 있었던 사건이다.

“기원전 3세기경에는 부왕·준왕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했다”는 국사 교과서의 기록은 <삼국지> ‘한 조’에 토대를 둔 것이다.

국사 교과서에 단군조선은 없다

위만은 연나라 사람으로 고조선에 귀화했다 준왕을 내쫓고 고조선의 왕이 되는 인물이다. 국사 교과서는 위만이 집권한 후 비로소 철기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결국 고조선은 기원전 3세기경에야 철기문화를 받아들였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위만이 연나라에서 오면서 철기문화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추측한 것에 다름없다. 실증사학을 표방하지만 위만에 대해 전하는 그 어떤 사료도 그가 철기문화를 갖고 왔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해 주는 내용이 없다. 마찬가지로 고조선이 위만이 오기 전까지 철기문화가 아니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고조선의 철기문화는 당연히 위만이 중국에서 가져왔을 것”이라는 자국사 비하의 고정관념 속에서 나온 기술일 뿐이다. 이렇게 따지면 위만은 고조선의 왕위 찬탈자가 아니라 철기문명의 전달자가 된다. 일제 식민지 치하를 찬양했던 식민사학의 논리가 아니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가치전도다.

지금까지 인용한 국사 교과서의 고조선 관련 부분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첫째, 고조선은 청동기시대 때 건국했으므로 만주에서 건국했을 경우 빨라야 기원전 15세기, 한반도에서 건국했을 경우 빨라야 기원전 10세기 이상 올라갈 수 없다. 따라서 기원전 23세기에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일연의 <삼국유사>는 결국 거짓이 된다.
둘째, 고조선은 기원전 3세기경에야 부왕·준왕 같은 강력한 왕이 나와 왕위를 세습한다.

셋째, 준왕은 기원전 194년에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다.
이 세 부분을 분석하면 기원전 23세기에 건국한 단군조선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은 교과서에서는 철저하게 부인된다. 고조선은 아무리 빨라야 기원전 15세기 이전에 건국될 수 없으며, 실제 역사상에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기원전 3세기부터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단군조선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기자조선의 실재는 부인하니 사실상 위만조선만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국사 교과서에 따르면 우리 역사의 시작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으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중국의 고대 사서 <삼국지>에 고조선의 부왕과 준왕이 나오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써주기는 했지만, 이들은 사실상 미아 같은 존재다. 단군조선의 후예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다음 구절을 보자.

“이 무렵, 고조선은 사회와 경제의 발전을 기반으로 중앙 정치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사업을 전개하여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또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동방의 예나 남방의 진이 직접 중국의 한과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무역의 이득을 독점하려 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기반으로 고조선은 한과 대립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한의 무제는 수륙 양면으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였다. 고조선은 1차 접전(패수)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약 1년에 걸쳐 한의 군대에 맞서 완강하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배층의 내분이 일어나 왕검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BC 108)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고자 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닥쳤다. 그리하여 그 세력은 점차 약화하였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고등학교 국사, 36쪽)

여기서 글의 앞부분에 있는 ‘이 무렵’이라는 말은 위만이 집권했을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고조선은 위만이 집권했을 무렵에야 중앙 정치조직을 갖춘 국가로 성장했다는 뜻이다. 단군조선은 차치하고라도 부왕과 준왕 때는 무슨 근거로 중앙 정치조직을 갖춘 국가가 아니었다는 말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사업을 전개하여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다”는 부분도 위만 때에야 고조선은 광대한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 이전의 고조선은 광대한 영토의 제국이 아니었다는 전제가 깔린 것이다.
그러면 국사 교과서는 무슨 근거로 이렇게 기술했는지 살펴보자. 국사 교과서는 <사기> ‘조선열전’과 <한서> ‘조선전’을 근거로 해당 부분을 저술한 것이다. 먼저 <사기> ‘조선열전’을 살펴보자.

“조선왕(朝鮮王) 위만은 옛날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왕(燕王) 노관(盧튷)이 한(漢)을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도 망명했는데, 1,000여 명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 복장(?結蠻夷服)을 입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빈 땅인 상하장(上下휮)에 살았다. 점차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의 만이(蠻夷), 옛 연(燕)나라, 제(齊)나라의 망명자(亡命者)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王)이 되었으며, 왕검성(王險城)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때는 효혜(孝惠)·고후(高后)의 시대로 천하(天下)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태수(遼東太守)는 곧 위만을 외신(外臣)으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만이(蠻夷)의 군장(君長)이 들어와 천자(天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天子)도 이를 듣고 허락하였다. 이로써 위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小邑)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眞番)과 임둔(臨屯)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 수 천리가 되었다.”

<사기> 조선열전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위만은 연나라 임금 노관의 신하였는데 노관이 한나라에 반발해 서쪽 흉노로 망명하자 위만은 동쪽 패수를 건너 진의 옛 빈 땅인 상하장으로 망명했다. 이곳에서 세력을 길러 진번·조선·연·제의 망명자를 모아 드디어 고조선의 준왕을 내쫓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

국사 교과서 무슨 자료를 보고 썼나

한나라의 혜제(惠帝, 기원전 195~188) 때 고후(高后)가 섭정하면서 천하가 안정되자 요동태수에 의해 한나라의 외신이 되었고, 주변 소읍들을 정복해 항복시키고 임둔과 진번도 와서 복종해 사방 수천 리의 영토를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한서> ‘조선전’의 내용도 거의 같다.

이 글을 볼 때 유의해야 할 점은 한나라를 중심으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역대 기록이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무조건 낮춰 기록한다는 사실은 하나의 상식이다. 그것도 자신과 싸웠던 나라에 대해서는 아주 심하게 비하한다는 점이다. <사기>와 <한서>의 조선 관련 기록은 조선왕 위만은 옛날 연나라 왕 노관의 신하였다가 다시 한나라의 외신이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기록이다.

연왕 노관은 한 고조 유방(劉邦)과 같은 풍인(豊人) 출신으로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워 유씨(劉氏)가 아닌 이성제후(異姓諸侯) 7인 중 한 명이다. 노관은 연왕에 봉해졌으나 한 고조가 이성제후들을 제거하려고 하자 북방 흉노로 망명해 흉노의 황제로부터 동호노왕(東胡盧王)으로 봉해진 인물이다.

<사기>나 <한서> 기록만으로는 위만이 조선왕이 되는 과정을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이 부분은 <삼국지> ‘동이열전’ ‘한(韓)조’에 더욱 자세한 정보가 등장한다.

“조선후(朝鮮侯) 준(準)이 참람되게 왕이라 일컫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衛滿)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는 글이 있다. 어째 심상찮다. 준왕이 왕이라고 칭한 것이 참람하다며 후(侯)라고 제멋대로 낮추는가 하면,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것이 사필귀정이라는 식이다. <삼국지>는 <위략(魏略)>을 인용해 더욱 자세한 사항을 기록한다.

“옛 기자(箕子)의 후예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으로 공격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고 하였는데, 그의 대부(大夫) 예(禮)가 간(諫)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예(禮)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조선왕의) 자손(子孫)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나라는 장군 진개(秦開)를 파견해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弱化)되었다.”(<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 조)

이 대목은 위만이 등장하기 전의 조선이 강성한 나라였음을 말해 준다.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중국인들이 고조선도 주나라의 한 제후국이었다고 강변하기 위한 대목에 불과하다.

<삼국지>의 내용은 연나라가 동쪽 고조선을 공격하려 하자 고조선왕이 역습하려고 했는데 고조선의 대부 예가 말리자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그 후 조선왕의 후손이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나라는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조선왕의 후손이 교만’했다는 것은 그만큼 고조선의 세력이 강했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진개가 “조선의 서쪽 영토 2,000여 리를 빼앗았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고조선이 평안남도 일대에 걸친 작은 소국이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좋은 자료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전체가 3,000리이며 현재의 평안남도는 1만2,300여㎡로 200여 리에 불과하다. 당시의 리(里)와 현재의 리(里)가 약간의 차이는 나겠지만 2,000여 리를 빼앗기고도 만번한을 경계로 연과 대치했다면 고조선은 광대한 강역을 지닌 제국일 수밖에 없다. 이때는 부왕과 준왕이 등장하기 이전이다. 그러나 국사 교과서는 이런 내용은 모두 사장시킨 채 위만이 정권을 빼앗은 다음 고조선이 강성해졌다는 식으로 묘사한 것이다.

고조선 서쪽 강역은 난하에서 시라무렌강까지

러시아의 고조선 연구자 유 엠 부친은 고조선의 강역이 서기 전 3세기까지 서남쪽으로는 베이징(北京) 위쪽의 난하(?河), 서북쪽으로는 내몽고의 시라무렌강 너머까지 이르렀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우리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을 한반도 내에 가두기 위해 애쓰고 있다. 또한 위만의 왕위 찬탈이 고조선을 크게 발전시킨 사건인 것처럼 쓰고 있다. 무엇보다 현재의 국사 교과서는 단군조선을 부인한다.

단군조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에 대응하는 데 근본적인 문제점이 생긴다. 단군조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이 우리 역사의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기자가 속해 있던 은(殷)나라가 동이족의 국가였다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제기를 할 수 있지만, 이는 다음 일이다.

일제 식민사관의 잔영이 그대로 투영돼 있는 국사 교과서는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 이를 제대로 잡지 못한다면 동북공정의 논리적 오류를 반박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덕일_역사학자

<월간중앙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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