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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부산국제 영화제 볼거리 넘쳐 허우적? 이걸 잡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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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은 '수쥬'(2000년)로 세계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로 예 감독의 신작'여름 궁전'. 중국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올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선보이는 바람에 일대 파란을 일으킨 문제작이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전후 격동의 시대 속에서, 주요 인물들의 10여 년에 걸친 개인사를 격정적.감동적으로 펼쳐보이는 휴먼 대하드라마다. 당대 중국 청춘들이 겪었을 법한 숱한 고민.투쟁6방황 등을 욕망과 섹스라는 화두를 통해 형상화했다. 성묘사가 하도 과감해 보는 내내 눈을 의심할 정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몽상가들'의 로 예 버전이라고나 할까.

아시아 영화 중에는 '하나'도 눈길을 끈다. 국내 영화팬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아온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최초의 사무라이극이다. 시대극이지만 사운드 및 연기 연출은 미묘한 현대적 느낌이 넘실댄다. 크로스오버의 포스트모더니티랄까. 영화를 관류하는 경쾌한 유머 또한 남다른 매혹을 선사한다.

한국 영화로는 '경의선'을 추천하련다. '역전의 명수'를 만든 박흥식 감독의 두 번째 작품으로, 독문학도 출신인 자전적 경험이 짙게 배어 있다. 지하철 기관사와 대학 독문학 강사로서 각자의 삶을 걷던 두 주인공이 경의선 임진강 역에서 우연히 만나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이야기.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과정을 응시하는 후반부 40분여의 감정선 처리는 단연 주목할 만하다. 전반부 1시간여의 평범함이나 다소 어색한 연기마저 구원하는 영화적 호흡을 구현한다.

아시아 바깥의 영화로는 우선 올 칸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브루노 뒤몽의 '플랑드르'. 우리네 인간들의 소통 부재를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소통 및 사랑의 필요성을 극사실주의와 미니멀리즘으로 묘사하며 역설하는 충격의 휴먼 드라마다. 1999년에 같은 상을 받았던 '휴머니티'의 폭력성을 압도한다. 어지간한 공포 영화도 흉내 낼 수 없는 섬뜩한 공포감이 감지된다.

왠지 부담스럽다고? 그렇다면 알제리 출신 프랑스 감독 라시드 부하렙의 '영광의 날들'을 강추한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조국' 프랑스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공식 역사로부터는 철저하게 외면당해 온, 13만 명에 달하는 북아프리카 토착민에게 바치는 진혼곡이다. 영화는 이들의 삶을 추적해 묘사하면서 잊혀진 역사를 아주 감동적으로 복원한다.

흥행과 비평 모두 독일에서 올 상반기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영화 '타인의 삶'은 위 두 작품의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안겨줄 필견(必見)의 수작이다. 1984년 동베를린을 무대로, 직원 10만 명에 밀고자 20만 명을 거느렸다는 옛 동독 비밀경찰기구 슈타지의 실상을 신랄하게 까발린다. 극적 구성과 설정이 탁월하다.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올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작품이다. 1920년대 아일랜드와 영국 간에, 나아가 같은 아일랜드인 간에 벌어졌던 비극적 충돌과 전쟁을 극화했다. 소재는 지독히도 정치적이건만, 말로 다 형용키 힘든 정서적 울림을 안겨준다. 그야말로 대가의 경지랄까.

평론가들이 뽑은 '크리틱스 초이스'섹션에서 선보이는 두 편의 문제작, '해로운 우정'과 '신선한 공기'도 놓치기 아깝다. 재미와 감동까지 겸비한 전자는 프랑스 대학의 문학도들 사이에 벌어지는 '불길한' 우정과 사랑에 관한 소품으로, 인물의 성격과 플롯의 견고함이 최상의 수준이다. 참, 감독 에마뉘엘 부르디외는 저명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들이다. 후자는 헝가리 영화의 저력을 웅변하는 작품으로, 철없는 10대 딸과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젊은 엄마 사이의 소통 단절을 일체의 감상과 수사를 배제한 채 냉철한 다큐멘터리적 시선으로 포착한다.

뭐니 뭐니 해도 '영화제는 짜릿한 자극과 센세이션이 제격'이라는 분들을 위한 성찬도 추천한다. 장편 데뷔작 '헤드윅'으로 유명해진 존 카메론 미첼의 하드코어 포르노그래피이자 섹스 오디세이인 '숏버스'. 그리고 괴팍하기 짝이 없는 3대 세 남자의 기괴한 삶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유머로 그려낸 '택시더미아'다.'헝가리의 박찬욱'기요르기 팔피 감독의 작품이다.

전찬일 (영화 평론가.숙명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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