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에 그려진 파편 어! 이게 뭐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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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서울 환기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프랑스 작가 4인의'공간의 시학'전(12월 3일까지.02-391-7701)은 카멜레온 같다. 햇볕이 쨍쨍한 대낮에 보느냐, 어스름 질 때 보느냐에 따라 작품의 색과 느낌이 달라진다. 벽.기둥에 흩어져 있는 노란 파편 같은 그림은 보는 이의 키와 시선, 장소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재해석된다.

세계적 작가인 다니엘 뷔랑(67)을 비롯해 프랑수아 모를레(80).펠리체 바리니(53).스테판 다플롱(34) 등 작가 네 명은 빛과 색으로 환기미술관이라는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오지 못한 모를레를 제외하곤 세명의 작가는 지난 2주간 현장에서 드로잉을 하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그림을 그리고, 햇빛의 양을 계산하며 유리 기둥을 설치했다. 말 그대로 '현장을 택한 예술가들'이다.

다니엘 뷔랑은 1층 한켠에 있는 큰 창문에 파란색.빨간색 등의 투명 시트지를 붙였다. 자연히 반대편 벽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또 햇빛의 양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모양이 투사된다. 환기미술관 큐레이터 이꼬까씨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이는 느낌이 너무 다르다. 관람객은 나만의 공간, 나만의 작품을 만나게 되는 셈"이라며"오전 11시에서 오후 2시 사이가 가장 아름다운 색과 모양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2층 계단을 올라가는 길에 펠리체 바리니의 노란 타원형을 맞닥뜨린다. 벽과 기둥에 무작위로 그린 듯한 이 그림은 실제로 바리니가 한 시점에서 텅빈 공간에 드로잉한 기하학적 도형과 선들이다. 입체적 공간에 그려진 평면적 그림은 이곳이 1차원의 세계인지, 3차원의 현실인지 순간 착각하게 만든다. 또 다른 공간, 하얀 벽에 동심원이 파편처럼 그려져 있지만 전시장 어느 한지점에 정확히 서면 통일성을 갖춘 그림을 찾을 수 있다.

팔순의 나이에도 활발한 창작활동을 벌이는 프랑수아 모를레는 수학적인 치밀한 계획과 계산으로 공간을 장악한다. 높은음자리표처럼 서있는 빨간 네온 조형물은 그대로 펼치면 지름 5m짜리 원이 된다. 완전한 것의 이면에는 언제나 불완전함이 존재한다는 철학이 숨겨 있다.

전시가 끝나면 작품들의 생명도 끝이 난다. 벽과 기둥은 다음 전시를 위해 흰색 페인트로 칠해진다. 설치작 또한 완전히 해체돼 또 다른 전시장으로 향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금 환기미술관의 공간 곳곳을 채우는 이들 작품은 존재의 허무감 만큼이나 느낌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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