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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금권정치 국민불신 초래(보수대연합과 일본경제: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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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세제ㆍ산업정책엔 으레 재계입김/「리크루트스캔들」은 대표적 비리
보수대연합이 이루어진 직후인 지난 56년 12월 일본 자민당은 최초로 자유경쟁에 의한 총재선거를 실시했다.
기시(안신개) 이시바시(석교담산) 이시이(석정광차랑)가 입후보했다.
2차투표까지 간 끝에 이시이의 지원을 받은 이시바시가 승리,수상이 됐다.
기시는 1차투표에서 1위를 하고도 과반수미달로 눈물을 삼켜야 했다. 이 선거에서 기시는 3억엔,이시이는 1억5천만엔,이시바시는 8천만엔을 썼다 한다.
이 선거는 파벌ㆍ금권ㆍ밀실정치의 출발선이 됐다. 정치가 더욱더 재계에 의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파벌을 유지하려면 돈이 엄청나게 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자민당파벌의 보스는 의원 1명당 연간 1천만∼2천만엔을 지원한다고 한다. 그 돈은 결국 재계에서 나오게 마련이다.
경단련의 하나무라(화촌인팔랑) 부회장은 88년 당시 『오랫동안 우리는 연간 1백억엔의 헌금을 자민당에 약속했고 이를 지켰다』고 밝혔다.
경단련은 86년 자민당에 1백15억엔,5개 파벌보스에게는 86억엔을 헌금했다.
지난해 아사히신문조사에 따르면 의원 1인당 연간평균 1억엔정도를 쓴다고 한다. 주는게 있으면 받는게 있게 마련이다.
88년 세제개혁때 경단련은 정부에 법인세 경감을 요구했다. 이때 대장성은 법인세 경감 조건으로 퇴직금 적립에 대한 과세공제등 우대조치를 없애려 했다. 그러나 경단련의 반대로 대장성이 물러섰다. 자민당이 거들었기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 60년 7월 이케다(지전)가 수상이 됐을때 재계가 열렬히 환영했던 것도 그의 경제성장 제1주의 때문이었다.
경단련은 자민당을 지원하는 대신 정부정책에 주문도 많이했다. 60년 12월부터 3개월간에 「고도성장 정책에 관한 견해」「공공용지 취득제한 개정에 관한 요망」「관세정책과 그 운용에 관한 견해」등 8개안을 내놨다. 이처럼 재계와 정부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일본의 산업정책을 만들어 끌고갔다. 여기에 정부의 자문기관인 각종 심의회도 한몫을 한다.
동경대 고미야 류타로(소궁융태랑) 교수는 「일본의 산업정책」이란 글에서 일본산업정책의 의사결정과정에 중요한 영향력을 가진 주체는 정부와 업종별 단체 및 각종 심의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업계지도자ㆍ전직관료ㆍ학자ㆍ기자로 구성된 심의회는 정부의 각종 자문에 보고서를 내고 정부는 이를 토대로 산업정책을 세운다. 통산성에는 산업정책 심의회등 32개의 심의회가 있다.
또 철강ㆍ자동차 협회등 각종 협회도 정부와 협조해가며 자신들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시킨다.
보수대연합후 자민당정부는 이같은 과정들을 거쳐 기계공업진흥 임시조치법(56년)ㆍ전자공업진흥 임시조치법(57년)등 특정산업육성을 위한 법을 만들어 기업을 밀어줬다. 또 57년 세제개혁에서는 석유화학ㆍ기계부품ㆍ기초기계ㆍ전자기계 업종에 대한 조세감면조치도 취했다.
이밖에 63년에는 해운재건 정비법을 제정,5년간 계획조선자금이자를 면제해주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취하고 있는 각종 경제정책의 대부분이 일본의 이같은 정책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 재무부의 한 관계자가 『한국의 해운산업 합리화조치는 일본 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실토할 정도다.
일본은 보수대연합이후부터 본격적인 경제개발계획도 수립,고도성장을 밀어붙였다.
하토야마내각의 경제자립 5개년 계획(56∼60년,연평균 8.7% 성장),기시내각의 신장기 경제계획(58∼62년,연평균 9.9% 성장),이케다내각의 국민소득 배증계획(61∼70년,연평균 10.7% 성장) 등이다. 기간이 겹치는 것은 목표를 앞당겨 달성한 때문이다.
이처럼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한 반면 그늘도 있었다. 이케다내각의 소득배증계획은 물가상승ㆍ환경오염ㆍ사회간접자본 건설지연등 문제를 낳기도 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분배의 불균형이란 문제도 심각한 비판의 대상이 됐다. 64년 수상이 된 사토(좌등영작)가 고도성장정책을 비판하고 안정성장론을 들고 나온 것도 이때문이다.
또 정치와 재계의 유착은 필연적으로 정치를 부패하게 만들게 마련이다.
뇌물수수혐의로 71명이 체포된 조선의옥사건(54년)이 대표적인 예다. 당시 자유당 간사장이던 사토(후에 수상)는 2천5백만엔을 조선공업협회로부터 받은 혐의로 체포직전까지 갔으나 법무장관의 지휘권발동으로 이를 모면했다. 이케다도 2백만엔을 전별금조로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다케시타(죽하등) 수상을 물러나게 한 리크루트스캔들은 자민당 파벌 영수가 모두 관련됐었다. 이사건은 소비세실시와 미농산물 수입 등과 맞물려 자민당을 참의원선거에서 참패하게 만들었다.
작년에 일본국민들의 정치불신은 극에 달했었다. 파벌과 금권정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같다.<이석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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