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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 백두산

중앙일보

입력

9월 29일 아침 드디어 백두산으로 향했습니다. 중국을 통해 백두산을 가본 사람들은 많지만 북한쪽에서 올라가본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흥분이 됩니다. 순안 공항에서 고려항공을 탔습니다. 이륙한지 10분쯤 지나니 산악지형이 시작됩니다. 한 눈에 남쪽보다 산세가 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산에 잔주름이 많다고나 할까요.

목적지인 삼지연 공항이 다가오면서 멀리 백두산이 보입니다. 9월말인데 벌써 눈이 와서 정상이 하얗습니다. 말 그대로 백두(白頭)산입니다. 처음에는 산이 너무 완만해서 백두산인가 아닌가 미심쩍어 했는데 삼지연이 이미 해발 1천4백m의 고원입니다. 아, 알고 보니 여기가 바로 교과서에서 배웠던 개마고원이네요. 이곳 사람들은 백두고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9월 29일 오전에 도착한 삼지연 공항 주변의 나무들은 한창 단풍이 들었지만 백두산 정상에는 벌써 눈이 쌓여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개마고원은 '이깔나무'로 황금빛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깔나무는 전나무 종류의 침엽수인데 희한하게 상록수가 아니라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드는 데다 잎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잎갈이를 한다고 해서 '잎갈이 나무'라고 하다가 이깔나무로 변했다고 합니다.

1시간만에 삼지연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하늘은 전형적인 가을 하늘로 푸르고 맑은데 벌써 바람이 심상치 않습니다. 영상 2도라는데도 무척 추웠습니다. 천지에 오르면 얼마나 추울까 걱정이 앞섭니다. 버스를 타고 백두산 정상까지 오릅니다. 정상까지 42킬로미터라는 표지판이 보이는군요. 길이 포장은 돼있는데 마치 비포장 길을 달리는 기분입니다. 하도 쿵쾅거렸더니 엉덩이가 아프네요.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정상이 아닙니다. 여기서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가야 합니다. '궤도삭도'라고 부르는 케이블카인데 공중에 매달린 게 아니라 바닥에 레일로 끌어당기는 케이블카입니다. 한번에 70명을 태울 수 있는데 요금이 1인당 무려 5달러입니다. 당연히 이곳 주민들은 그냥 걸어 올라갑니다.그런데 경사가 장난이 아닙니다. 얼핏 보기에 30도는 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부터 천지까지 고도는 350m에 길이는 1천2백m입니다.



삼지연공항에서 백두역까지는 버스로 이동하고 이곳에서 장군봉 옆에 있는 향도봉까지 '궤도삭도'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궤도삭도를 내려서 행사장인 천지까지 약 1백m를 걸어가야 합니다. 으아, 정말 바람이 매섭습니다. 엄청납니다. 바람막이 재킷에 파커까지 입었는데도 몸이 움츠러듭니다. 9월의 백두산을 우습게 보고 방한복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은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입니다. 뺨이랑 귀가 떨어져나가는 것 같습니다.

천지에 도착했습니다. 사진이나 TV로만 봤던 천지. 일단 첫 인상은 웅장하다는 것입니다. 가슴이 턱 막힙니다. 너무 멋있습니다. 한민족의 기상, 뭐 그런 것도 느낄 수 있습니다. 뭉클해집니다. 세찬 바람 속에 웅크리고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추위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성화 채화식이 시작됐습니다. 바람이 워낙 강하게 불어 채화식은 약식으로 진행됐습니다. 부산 아시안게임과 대구 유니버시아드에도 왔던 취주악단 중 16명이 이 행사를 위해 평양에서부터 같이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정복 입고 연주를 합니다. 우리는 사진찍는다고 조금만 손을 내밀고 있어도 손이 곱고 시린데 꼼짝 않고 연주합니다. 참 대단합니다. 이미 우리 귀에도 익은 '아리랑'과 '우리는 하나'를 연주했습니다.



향도봉정상황에서 제주도 평화축전을 밝힐 성화가 채화돼 북측의 첫 성화주자인 국가체육지도위원회 간부 박일만씨에게 전달됐다.




29일 성화채화식이 있던 백두산에는 체감온도 영화 20도 이하로 춥기도 했지만 서 있기 힘들정도의 거센 바람이 불어 참가자들의 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행사 마쳤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백두산 밀영'을 들른다고 합니다. 밀영은 비밀 야영지입니다. 바로 김일성 주석이 항일 운동하던 곳이자 김정일 위원장의 생가라고 합니다. 가는 중간에 야외에서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백두산 오는 사람들은 모두 다 이렇게 점심 식사를 한다"고 설명하네요. 어쨌든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백두산 밀영에 도착했습니다. 아, '정일봉'이 보입니다. 높은 봉우리에 빨간 글씨로 정일봉이라고 써놓은 곳. TV에서 봤던 그곳입니다.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에게 권력 승계 작업을 하면서 김정일 위원장을 '백두산의 정기를 타고 난 장군님'으로 우상화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성지(聖地)로 조성했습니다.



간백산 백두산밀영에 있는 '빨치산 사령부 자리'에서 해설강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것으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생가를 모두 보게 됐습니다. 오는 길에 또 한군데를 들렀습니다. 삼지연(三池淵)입니다. 이름 그대로 세 개의 연못(연못이라고 하기에는 크고, 호수라고 하기에는 작습니다)이 있습니다. 이곳은 1998년 겨울 아시안게임 개최지로 선정되면서 알려지게 된 곳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북측이 못하겠다고 해서 부랴부랴 1년 뒤인 1999년 강원도 평창에서 하게 됐지요.



백두역과 향도봉을 오가는 '궤도삭도'에서 바라다 본 백두고원



세 개의 호수도 참 아름답고, 바로 백두산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 삼지연도 성지로 조성해 놓았더군요. 바로 1939년 김일성 주석이 항일부대를 이끌고 물을 먹은 곳이랍니다. 김일성 주석이 이곳에서 물을 먹으면서 "물 맛이 좋다. 이 물을 먹고 힘을 내서 조국해방을 위해 싸우자"라고 말했답니다. 김일성 주석이 나중에 다시 와서 기념촬영했다는 표지판도 있습니다. 백두산과 삼지연을 일직선으로 잇는 곳에 15m짜리 거대한 '청년 김일성' 동상이 세워져 있군요.

나중 일정 때문에 천지의 감동이 조금 사라지긴 했지만 백두산을 다녀온( 그 추위에) 경험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백두산의 날씨는 변화무쌍합니다. 보통은 안개가 끼는 경우가 많아서 맑은 하늘을 보는 경우도 드물다고 합니다. 비록 바람이 많이 불긴 했지만 그만큼만 해도 괜찮았다는 해석이었는데 나중에 만난 평양 관광객 얘기를 들어보니 다음날은 바람 하나 없이 너무 따뜻했다는 겁니다.
손종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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