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처녀 해외 유출로 골머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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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반 소련 붕괴와 함께 찾아온 경제난 속에서 외국 남성들과의 결혼을 통해 ‘팔자를 고치겠다’는 여성들이 늘면서 ‘인터걸’이란 신조어까지 생겨났던 풍속도가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의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외국 남성과 결혼해 고국을 등진 러시아 여성 수는 17만여 명에 이른다. 이들 중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꿈꾸며 미국행을 택한 여성이 7만5000명으로 가장 많았고, 터어키(6만 명), 독일(2만 5000명), 북구 국가(1만 명) 등이 뒤를 이었다.

터어키가 높은 순위에 오른 것은 단기 여행에 나섰던 러시아 여성들이 현지 남성들과 결혼해 정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터어키는 러시아와 지리적으로 가깝고 여행비용이 저렴해 러시아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관광지에 속한다.

최근 유력 터어키 방송 NTV는 “지난 10년간 20만 명의 러시아 여성들이 터어키 남성들과 결혼했다”며 다소 과장 섞인 보도를 하기도 했다.

이처럼 러시아 여성들의 국제 결혼이 붐을 이루는 것은 공급자측과 수요자측의 요구가 잘 맞아떨어진 때문이다. 러시아 여성들의 미모는 단연 세계 제일 수준이다. ‘여자’는 ‘보드카’, ‘흑빵’과 함께 러시아가 내세우는 3대 자부심 목록에 든다. 배우자를 찾는 수요자 입장에서 보면 누구나 탐을 낼 만하다. 반면 개방과 함께 ‘돈 맛’을 알게된 러시아 여성들(공급자측)은 풍요롭고 여유있는 선진국 생활에 대한 동경심이 한층 커졌다. 러시아 여성들이 외국행을 택하는 가장 큰 이유다.

이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반응은 심각하다. 매년 80만~90만 명에 이르는 자연인구 감소에 여성들의 외국 유출이 적잖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당국은 현재 1억4000여만 명인 국내 인구가 매년 감소 추세를 보이면서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인구 대책을 세울 것을 지시했을 정도다. 올해 초엔 의회가 ‘외국으로 시집가는 여성들의 국적을 박탈하자’는 내용의 국적법 개정안을 제출하기 까지 했다. 대다수 의원들의 반대로 무산되긴 했지만 이 제안은 러시아 정부가 자국 여성들의 해외 유출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제결혼에 대한 여론의 찬반 논쟁도 뜨겁다. 여성 상원의원인 류드밀라 나루소바는 지난 18일 현지 일간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와의 회견에서 “선진국의 물질적 풍요도 유인 요인이지만 러시아 남성들의 만성적 음주 풍속이 젊은 여성들을 외국으로 내몰고 있다”며 자국 남성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하원 여성ㆍ가족분과 위원회 부위원장 니나 오스타니나도 “상당수 러시아 남성들이 정신적으로 독립심을 잃고 여성들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문제”라며 ‘남성 책임론’을 주장했다.

반면 유명 여성 작가인 마리야 아르바토바는 “러시아 여성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용카드를 가진 사람을 찾고 있다”며 여성들의 물질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유철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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