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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53. 나이팅게일 선서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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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나이팅게일 선서식에 참석한 간호사들을 격려하고 있는 필자.

병원은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원무(院務)직원 등 다양한 직업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간호사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내가 옛날 동네 산부인과나 지금의 가천의대 길병원을 운영할 때도 간호사들은 항상 고락(苦樂)을 함께하며 봉사정신을 발휘한 동반자였다.

1980년대 초 나는 "사명감 있는 모자(母子)보건요원 양성을 위해 무료 간호학교를 설립하고 싶다"는 포부를 조선일보 칼럼난'일사일언'에서 밝힌 적 있다. 당시만 해도 현대의료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오지와 낙도에서는 짚을 깔고 아이를 낳는 경우가 있었다. 집에서 낳을 때도 소독도 안한 가위로 탯줄을 자르고, 바느질을 하기도 했다.

이런 딱한 처지에 있는 임신부들을 돌봐줄 사명감 있는 간호사를 길러 의료 취약지에 내보내고 싶었다.

대학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시골 학생들을 무료로 교육시킨 뒤 고향에서 5~6년간 의무적으로 봉사하는 시스템을 갖춘다는 것이 나의 구상이었다.

이처럼 간호사 양성은 내 오랜 꿈이었다. 94년 부도로 어려움을 겪는 경기전문대학(옛 경기간호전문대학)을 인수해 지금의 가천의대로 키우고, 98년 경원전문대학을 인수한 건 그런 간절한 내 꿈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 두 대학에는 간호학과가 있다. 지금도 두 학교에서 매년 200여 명의 간호사가 배출된다. 학생들은 간호사 교육과정을 밟으며 '나이팅게일 선서식'을 치른다.

숙연한 표정으로 촛불을 들고 새로운 봉사의 길에 나설 것을 다짐하는 학생들은, 말 그대로 천사의 모습이다.

난 그 자리에서 늘 "여러분이 한국의 나이팅게일로서 인류애에 불타는 '병실의 파수꾼'이 되어 달라"고 당부한다.

내가 '환자의 숲'에 갇힌 의사로 오랫동안 살아왔기에 그만큼 간호사들과의 정도 깊다. 내가 환자를 돌보느라 밤을 새면 그들도 지친 몸으로 같이 있어 주었고, 식사를 제때 못하는 나를 위해 함께 배고픔을 참아야 했다.

지금도 길병원에선 많은 간호사들이 환자들을 위해 밤낮 없이 일하고 있다. 여기에는 내가 맡고 있는 대학을 나온 제자도 있고, 다른 간호대학에서 뽑아온 간호사도 있다. 난 이들에게 "자신을 사랑하고 나아가 인간을 사랑하는 박애.봉사정신을 가져 달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환자를 보살피는 것뿐 아니라 항상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내 뜻을 잘 이해하며 묵묵히 일하는 간호사들이 너무 고맙다. 그리고 e-메일과 편지 등을 통해 간호사들을 칭찬하는 글이 나날이 쌓이고, 그것을 읽는 재미는 나에게 또다른 활력소이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시는 제 할머니의 대.소변을 갈아주면서도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 간호사 선생님, 천사 같아요." 간호사들의 정성이 만들어낸 각본 없는 드라마에 난 울고 웃는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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