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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쇠기도 평등하게

중앙일보

입력

요즘 젊은 남자들과 비교하면 별게 아니에요."

한국여성의전화연합에서 '모범 평등부부'로 추천한 종주(60).박순란(52)씨 부부는 경기도 안산시 집으로 찾아간 기자를 보자마자 "자신이 취재 대상이 되는 게 새삼스럽다"며 손사래부터 쳤다.

하지만 가부장제의 불합리성을 알리기 위해 '박'이라는 성(姓)도 사용하지 않는 종주씨는 신세대도 따라가기 힘든, 남다른 평등의식의 소유자다.

"1974년 결혼할 때 주위에서 수군댔어요. 혹시 동성동본 결혼이 아니냐는 거지요."

번번이 "우리는 본(本)이 다르다"고 해명을 하면서 종주씨는 족보를 들여다봤다. 어머니의 핏줄은 인정하지 않는 족보의 흐름을 보면서 부계혈통의 모순을 깨달았다. 똑같은 인격체인 남녀가 불평등하게 취급받는 관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주씨는 10여년 전부터 자료를 모아 '양계혈통연구소'라는 인터넷 사이트(www.root.or.kr)도 운영하고 있다.

3남3녀의 장남인 종주씨가 팔순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아들에게, 특히 장남에게만 집중된 '부양의무'에 대해 부담을 느낀 것도 가부장적 관습에 반기를 든 원인이 됐다. 부계혈통만 인정하는 가부장적 문화는 남녀 모두에게 힘겨운 굴레라는 생각이 들었다.

패션디자인학원을 운영하며 바쁘게 뛰고 있는 아내 박씨가 집안일까지 떠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고정관념을 깨는 일도 처음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종주씨가 10여년 전부터 운전일을 접고 웹마스터로 재택근무를 하면서 청소와 설거지만큼은 아내에게 미루지 않는다.

종주씨는 "명절문화 또한 가정내 남녀차별 문화의 한 예"라고 말한다. 아들 중심으로 모이는 데다 궂은 일은 며느리가 도맡고 있는 관습은 버려야 할 폐습이라는 것. 남성 중심의 명절을 치르면서 여성들의 소외감과 불만이 쌓이게 되고 이 때문에 명절 전후에 부부싸움도 잦아지는 등 가족간 갈등의 골이 파이게 된다는 것이다.

종주씨는 5년 전 자신의 형제.자매와의 가족회의를 통해 설은 친가에서, 추석은 처가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고스란히 여자들 부담이었던 명절 준비도 나눠 하기로 했다. 장보기와 음식 재료 손질은 함께 한다. 청소와 설거지는 남자들의 몫. "요즘 남자들은 요리도 잘 하던데…." 이미 머리가 하얗게 샌 종주씨는 계속 '요즘 남자'들만 못하다며 쑥스러워했다.

이런 종주씨를 바라보는 아내 박씨의 표정에는 자랑스러움이 가득하다. 박씨는 "남편이 먼저 나서주니 일이 고단해도 짜증이 나지 않는다"며 "고맙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장손인 종주씨는 제사문화도 바꿨다. 1년에 하루 날을 정해 증조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 제사를 함께 지낸다. 각각 돌아가신 날에 맞춰 지내다보니 생업에 쫓겨 참석하지 못하는 자손들이 더 많기 때문. "참석하지 않은 제사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종주씨는 매년 11월 넷째 토요일을 합동제사의 날로 정했다. 음식상도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차린다. 이 때문에 제삿날은 친척들이 모이는 잔치처럼 됐다.

물론 매사가 종주씨 생각대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여동생들 시댁의 이해와 협조를 받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장인.장모가 돌아가신 종주씨가 어머니가 살아계실 동안은 추석에도 어머니와 함께 지내기로 했다.

또 올 3월 결혼시키는 종주씨의 딸(28)도 추석 때 종주씨 집을 우선적으로 찾을 수 있을는지 장담할 수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의 벽에 대해서도 종주씨는 의외로 담담하다.

"분명히 사회는 양성평등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명절문화도 마찬가지겠지요. 하지만 집안마다 사람마다 진행속도가 다른데 번번이 마찰을 빚으면 되겠습니까."

종주씨는 "젊은 여성들이 가부장적인 문화를 바로잡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성들은 기득권을 내놓기 싫어하고, 나이든 여성들은 이미 가부장적 문화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란 것.

종주씨는 "젊은 여성들이 자기 집에서부터 평등의식를 심는 데 앞장서면 한 세대 후에는 문화가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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