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여가 즐기면 폐암이 도망간다

중앙일보

입력

"우리 집 오동나무 이층장 위칸에는 남자 모자가 여덟 개나 들어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회한을 체험적으로 서술한 박완서씨의 소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이렇게 시작한다. 항암제로 머리카락이 빠질 때마다 이를 가리기 위해 사들인 모자가 여덟개나 되었던 것이다.

1988년 숨진 남편의 병명은 다름 아닌 폐암이다. 당시만 해도 폐암은 한국인에게 비교적 드물게 발생하는 암이었다.

그러나 불과 10여년 만에 상황은 급변했다. 2000년 폐암이 부동의 1위였던 위암을 사상 최초로 누르고 줄곧 수위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폐암은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암이다. 미국에서만 해마다 17만여 명이 폐암으로 숨진다. 이는 유방암과 전립선암.대장암을 합친 것보다 많다.

폐암이 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폐암은 모든 암 중에서도 가장 치료하기가 어려운 병이다. 첨단의학의 본고장 미국에서도 폐암환자의 평균 5년 생존율은 고작 14%에 머무르고 있다.

대장암 63%, 전립선암 90%, 유방암 86%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기침이나 가래 등 증상이 나타날 때쯤이면 이미 3기 이상으로 진행된 상태며, 1기에서 3기로 악화하는 데 6개월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증식 속도가 빠르다.

그러나 국내 병원의 폐암 조기발견율은 18.2%에 불과한 실정이다.

둘째 이유는 고통 때문이다. 기자는 호스피스 전문가로 말기 암 환자들의 임종을 오랫동안 지켜본 성모병원 종양내과 홍영선 교수에게 모든 암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는 폐암을 첫손에 꼽았다.

이유는 몰핀주사 등 마약으로 통증이 어느 정도 조절되는 다른 부위의 암과 달리 폐암은 모르핀으로도 어쩔 수 없는, 호흡곤란이란 폐암 특유의 통증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그렇다면 폐암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엔 어떤 게 있을까.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금연이다. 흡연자는 비흡연자에 비해 13배나 폐암에 잘 걸린다. 담배를 끊게 되면 폐암 발생률은 느리지만 분명히 감소한다. 금연 후 3년부터 폐암 발생률이 떨어지기 시작해 15년이 지나면 비흡연자 수준으로 떨어진다.

폐암과 관련해 가장 안타까운 인물이 바로 한용철 전 서울대병원장이다. 기자 초년병 시절 왜 호흡기내과의 명의로 알려진 분이 담배를 피우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는 흡연의 피해는 의학적으로 통계를 통해 확연히 드러난 사실이지만, 암에 걸리고 안 걸리고는 개인이 지닌 유전자에 의해 좌우된다고 말했다. 수십년간 경험으로 자신의 폐는 담배 연기에 강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해야 했다. 분명 담배 연기에 강한 이른바 항연(抗煙) 유전자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유전자는 매우 드물며, 자신이 그런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아직 없다.

폐암 극복을 위해 추천할 수 있는 유력한 둘째 수단은 여가활동이다. 여기서 여가활동이란 직업활동 외에 시간을 따로 내 즐기는 운동과 문화생활을 말한다.

미국역학회지엔 최근 2천여명의 폐암 환자를 대상으로 여가활동과 폐암 발생률을 조사한 이색적인 연구결과가 실렸다. 주당 34.4시간 이상 충분히 걷기와 잔디깎기.구기운동.댄싱.영화감상 등 여가활동을 즐긴 사람은 주당 6.3시간 이하였던 사람보다 폐암 발생률이 49%나 낮았다.

절반 가까이 떨어진 셈이다. 이것은 금연 외에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강력한 폐암 예방 수단이다. 주당 34.4시간이면 대략 하루 5시간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주당 17시간(하루 2시간30분 정도)만 내보자.

이 경우에도 폐암 발생률이 32%나 줄어들었다. 꼭 땀을 흘리며 헉헉거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유를 즐기는 생활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담배를 끊고 여가활동을 통해 무서운 폐암의 공포에서 벗어나기를 당부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