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못 준 4당 대표연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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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김수환 추기경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국민 사기의 저하와 사회활력의 침체는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모처럼의 정치지도자들의 국회연설에서 뭔가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북돋우는 메시지가 나았으면 하는 기대를 가졌으나 지난 이틀간 국회에서 있은 4당 대표연설은 한마디로 말해 이런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 것 같다.
4당대표들 역시 한결같이 현 시국이 난국이고 위기적 요소가 깔린 상황이라고 보는데는 일치했지만 난국을 극복할 처방을 제시하는데는 모두 미흡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핵심적과제가 되고 있는 5공청산 문제에 대해 4당대표들은 각기 그럴듯한 수사와 논리를 동원했지만 그들이 제시한 방안은 결국 지난 1년여 동안 수없이 되풀이해 실패한 방안 그대로였다. 3야당측은 전대통령들의 증언과 이른바 5공핵심인사들의 추진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여당측은 퇴진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종전 태도 그대로였다.
그동안 신물이 나도록 들어온 양측 주장의 반복이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올해까지도 5공청산을 끝내지 못하지 않을까, 이 정계의 능력으로는 끝내 이 문제를 못 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지우기 어렵다.
김대중 평민당총재가 「증언」과「퇴진」만 이뤄지면 더 이상 5공청산을 문제삼지 않고 공직을 물러난 사람에게 어떤 제약도 요구하지 않겠다고 다소 유연한 제의를 했지만 이 역시 여당이나 당사자가 받아들일까는 의문이다.
일단 「퇴진」을 수락한다는 것은 광주사태의 책임을 자인한다는 뜻이 되고, 퇴진후 공직취임이나 재출마를 문제삼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제로는「광주사태책임」을 지고 일단 물러난 사람의 공직기용이나 공천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특정인의 진퇴가 5공청산의 걸림돌이 되고있는 이런 상황으로 몰아온 우리 정치의 궁핍한 논리를 새심 개탄하면서 그래도 이 지경에 이른 이상 여야가 기교적인 타협책이나마 마련하는 데 성의를 다하도록 당부하고자 한다.
곧 3야당총재회담·여야중진회담 등이 예정돼 있는 만큼 여야 주장의 옹색한 틀 안에서나마 문제를 대국적으로 마무리할 방안을 찾아주기 바란다. 5공을 청산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권위주의 요소의 제거와 민주화개혁의 추진이요, 거룩한 광주희생의 정신을 전국민의 민주화의지로 심어 민주화를 구현하는 일 일 것이다.
정계의 수준 낮은 공방으로 5공청산이 이제는 마치 무슨 구호처럼 되고 그 본뜻을 잊어버리게 되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
여야는 5공문제의 연내 종결을 위한 협상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각종 입법작업에 매진해야 한다. 여야 할 것 없이 모두 말로는 악법을 고치자, 공개념 입법을 관철하자고 떠들면서도 실제 일은 않고 있다. 가령 농가부채 경감문제만 해도 이미 예산까지 확보해 놓고도 여야 절충이 안돼 시행을 못보고 있고, 보안법을 고치자고 한 게 언제부터인데, 아직 시안도 안낸 당이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국민은 이미 말만 많고 일은 못하는 정치권의 모습에 짜증이 난지 오래다.
4당은 기왕 5공문제에 관해서는 한계를 드러냈으니 그렇다치고 각종 개혁입법과 민생사안에 대해서는 부디 좀 열의를 갖고 빨리빨리 움직여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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