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수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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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찬 새벽이라야 물이 차고/차고 시린 맑은 정신이 든다./ 새벽 약수터에서 나는/오늘 하루의 오염을 미리 씻어 낸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물들지 않으려면/어지러운 세상 살아가려면/그리고 내가 할 일을 굽히지 않으려면/차고 매운 정신으로/똑바로 보고 똑바로 걸어야지./」 정대구 시인의 『약수터에서』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언제부터인가 이른 아침이면 물통을 들고 가까운 약수터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걷는 적당한 산보와 함께 새벽의 약수터에서 시원한 약수 한 잔을 들이키는 맛은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그러나 요즘의 약수터는 그야말로 도떼기 시장을 방불케 한다.
대형 플라스틱 물통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늘어선 것은 물론 이따금 새치기라도 생기면 금방 아귀다툼이 벌어진다.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던 새벽의 약수터가 요즘은 전쟁터가 되었다.
약수터가 이처럼 성시를 이루는 것은 수돗물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당장 오늘 신문을 들쳐봐도 식수 오염에 관한 기사가 온 지면을 뒤덮고 있다.
그러나 약수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최근 서울시가 조사한 것을 보면 서울 근교 1백72개소의 약수터를 검사한 결과 65%인 1백12개소의 약수는 마시기에 부적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개중에는 수질 자체에 문제가 있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물 뜨는 바가지에 대장균이나 일반 세균이 묻어 있는 인위적 오염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약수터로 알려진 샘은 전국에 1천개가 넘는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석간수라고 하는 자연수일 뿐이다. 진짜 약수는 물에 탄산가스와 산소가 많이 들어 있는 천연 탄산수를 말한다. 마셔보면 씁쓸하면서 톡 쏘는 듯한 자극을 준다.
얼마 전 한국 온천 개발 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국에 진짜 약수터는 35개소에 불과하다고 한다. 설악산의 오색약수, 속리산의 초정 약수 등 대부분 심산 유곡에 있는 약수터다. 북녘 땅에 있는 삼방 약수도 빼놓을 수 없다.
「하루의 오염을 씻는」 약수터마저 오염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소식은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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