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에서의 첫 한국화전|「동방의 빛」을 마치고…김병종(한국화가·서울대교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한국회화 사상 초유로 지난 7월 4일까지 두 달에 걸쳐 헝가리와 독일에서는 대규모의 한국화 전람회인 「동방의 빛」전이 열렸다. 그곳 화랑의 초청으로 기획된 이 전람회에 50대 초반에서 30대 중반까지의 작가들이 출품한 1백50여점의 작품을 가지고 필자는 7월 1일 현지로 떠났다.
그간 현대 한국화가 부분적으로 구미에 소개된 적은 간혹 있었지만 50호 이상의 대작들로 여러 경향을 망라하여 이번처럼 본격적으로 대규모의 순회전을 갖게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번 전람회는 한국화의 로컬미술로서의 이색성을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현대미술의 한 장으로서 동방미술의 가능성을 겨뤄보려 했다는 점과 한국화가 중국이나 서구 일방과의 비좁은 교류체제를 벗어나 20세기 후반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오른 동구권으로 진출하여 그 공감대를 형성하려 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아울러 「동방의 빛」전은 전람회기간 중 그림만 붙이고 떼는 평면적 관행에서 벗어나 우리 그림의 특질에 대한 사적 이해를 위해 필자의 한국회화에 대한 강연과 더불어 역대 민·관 회화의 걸작들을 슬라이드해설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한층 전람회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특히 「동방의 빛」전이 열린 헝가리의 부다페스트갤러러는 헝가리정부가 자유화정책과 더불어 반관·반민의 형태로 정책적인 후원을 하고 있는 헝가리 최대의 화랑으로 화랑종사원만도 20여명이 넘었고 요셉 보이스 등 서방의 유명작가들이 전람회를 가졌던 곳이지만 동양에서 이번 경우처럼 대규모의 작품이 건너간 적은 처음이어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들은 중국화와 북한의 조선화는 단편적이나마 가끔 접할 수 있었지만 한국화에 대한 인식은 전무한 상태인 것 같았고, 북의 조선화를 한국회화의 대표성으로 인정하고 있던 차에 「동방의 빛」전을 통해 한국회화가 전통적인 재료로 개방적이고 다양한 회화세계를 지니고 있다는데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필자의 강연 후 청중의 요청에 의해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수묵화 시범에서도 그들은 찬탄과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의 현대회화는 미국미술이나 서구유럽의 사조에만 민감할 것이 아니라 제3세계의 미술문화권과 새로이 교류하고 공감의 폭을 넓힘으로써 스스로의 입지를 세워가야 하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특히 80년대의 새 한국화는 동아시아 인접국가들과의 동류적 교류체제 일방을 벗어나서 이질적 미술양식들과도 부단히 교류함으로써 전통과 현대를 아울러 호흡하는 독자적 양식개발을 서둘러야 하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동방의 빛」전은 현지에서의 호응으로 90년 여름 모스크바에서, 그리고 91년 여름 뉴욕에서 강연과 더불어 다시 대규모로 펼쳐지게 됨으로써 한국화의 세계성을 높이는 동시에 새로운 양식의 탐색을 시도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