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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쓰기'식 불법 시위 약발은 더 잘 먹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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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폭력시위는 줄었지만 시위 현장에서 다친 경찰은 늘었다. 시위 문화는 거의 바뀌지 않은 반면 경찰의 대응은 소극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경기도 평택에서 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경찰 방패를 밟은 채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중앙포토]

1987년 6월의 거리는 민주화 열기로 뜨거웠다. 청년.학생은 물론 넥타이를 맨 회사원까지 민주화를 요구, 대통령 직선제(6.29 선언)를 이끌어냈다. 6월 항쟁 이후 시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과연 시위 문화가 성숙됐을까. 동아시아연구원(EAI)은 6.10 항쟁 이후 벌어진 주요 시위의 특징을 찾아냈다. 주요 분석 대상은 중앙일보.한겨레신문.시사저널.주간조선 등 4개 매체에 89년 이후 보도된 주요 시위 5400건이었다. 경찰청의 집회.시위 통계도 참고했다. 89~2005년 시위를 분석했지만 일부 결과는 2003년까지만 나왔다.

◆ 불법 시위 '효과적'="법률 위에 헌법, 헌법 위엔 '떼법'이 있다고 하잖아요. 떼를 쓰면 들어주는 '국민 정서법' 말입니다."

지난해 5월부터 서울경찰청 소속 기동대 소대장으로 근무 중인 이병선(25) 경위는 "관공서나 기업이 불법 시위대의 요구를 뿌리쳐야 함에도 이를 순순히 들어주는 것을 보면 씁쓸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전경 100여 명이 다친 지난해 울산 플랜트 노조의 시위, 화물연대 파업 등의 경우 나중에 '민.형사상 책임을 최소화하기로 합의했다'는 기사가 나오더군요. 시위대가 그렇게 될 걸 알고 격렬하게 나온 건지…."

동아시아연구원의 분석 결과 불법 시위대의 요구 사항을 관공서가 받아들인 비율은 29.1%였다. 반면 준법 시위의 요구를 수용한 비율은 25.2%였다. 시위대 입장에선 굳이 법을 지킬 이유가 약한 것이다. 관공서 중 중앙부처.국회.정당보다 지방자치단체 앞 시위의 수용 비율(31.7%)이 높았다. 김선혁(동아시아연구원 분권화센터소장) 고려대 교수는 "불법 시위대의 요구가 잘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아직 한국 민주주의가 미숙하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 거리 시위 크게 늘어=언론에 보도된 주요 시위의 장소 중 도로.거리 비율이 다시 높아졌다. 89년 주요 시위의 60%는 도로.거리에서 벌어졌다. 이후 점차 줄기 시작해 2000년 12.9%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그 뒤 다시 늘어나 2003년 82.5%에 이르렀다. 그만큼 교통질서 침해 사례가 늘었음을 뜻한다. 시위 장소에 관한 동아시아연구원의 분석 결과는 2003년까지만 나왔다.

이와는 별도로 취재팀이 경찰청 자료를 분석한 결과 거리.도로 시위자는 ▶2003년 76만 명 ▶2004년 58만 명 ▶2005년 60만 명으로 나타났다. 2003년 이후에도 거리.도로 시위의 비율이 계속 유지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다. 성공회대 김정훈 연구교수(NGO대학원)는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 이후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에 항의하는 촛불 집회를 벌이면서 시민 인식이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시민들이 도로.광장을 자신들의 불만과 욕구를 분출하는 공간으로 여기게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 경찰 부상 다시 늘어=폭력 시위는 줄고 있지만 시위 현장에서 부상한 경찰의 수는 늘고 있다. 94~97년 연평균 718건에 달하던 폭력시위는 98~2005년 평균 117건으로 떨어졌다. 반면 노무현 정부 3년간(2003~2005년)의 경찰 부상자는 모두 2263명으로, 김대중 정부 5년간(98~2002년, 1552명)보다 오히려 46% 많다.

한남대 이창무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시민단체와 노조에 '채무 의식'이 있는 현 정권이 불법행위에 강력히 대응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경찰의 시위 대응은 한층 수동적으로 바뀐 반면, 시위 주최 측은 아직 경찰을 '적(敵)'으로 여기는 사고를 버리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6개월 전 한국인 원정 시위로 곤욕을 치렀던 홍콩경무처(경찰청) 경비담당 헨릭 구수훙(古樹鴻) 조리경무처장은 "홍콩의 집단.시위 기준으로는 이해 못할 일"이라며 "시민사회부터 경찰이 사회 질서를 지키고 사회에 봉사하는 조직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 학생에서 시민단체.화이트칼라로=주도 단체가 다양해졌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노조와 학생 단체가 양대 축이었다. 이후 학생 단체의 퇴조세가 뚜렷해지면서 시민단체가 그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학생단체가 주도한 시위는 89년 22.5%에서 10년 뒤인 99년 3.4%로 크게 줄었다. 참가자 직업 역시 달라졌다. 2000년 이후 화이트칼라가 블루칼라를 앞섰다. 블루칼라가 주도한 시위 비율은 98년 59.5%로 꼭짓점을 찍은 뒤 2000년 15.2%로 떨어져 10%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시위 참가자 중 지역주민의 비율이 다시 느는 추세다. 89년 9.3%에서 97년 37.5%로 늘었다가 이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급격히 줄었다. 하지만 2001년 이후 증가세로 바뀌었다. 2002년 16.4%, 2003년 22%였다. 시위 주제가 이념에서 지역 현안으로 대체되고 있음을 뜻한다.

◆ 불법.합법 시위 기준=동아시아연구원은 시위 참가자가 건물.도로를 무단 점거하거나 경찰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한 경우 불법 시위로 분류했다. 경찰청의 분류 기준(집회 신고 여부)과는 다르다.

▶취재=허귀식.천인성.박수련 탐사기획부문 기자

<(deep@joongang.co.kr>)

▶분석=동아시아연구원 김병국 원장, 정원칠.정한울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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