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화학이야기

'탕아' 탈리도마이드의 부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지난 4월 말 '살아 있는 비너스', 영국의 구족화가 앨리슨 래퍼가 방한했다. 그녀는 팔다리가 짧은 선천성 기형을 가졌다. 1950년대 말 유럽 전역에서 이런 기형의 아이들이 줄줄이 태어났다. '탈리도마이드 베이비'들이다.

57년 독일의 그루넨탈 제약회사는 새로운 수면제를 개발했다. 동물 실험 결과 부작용이 없어 보였다. 사람 대상 임상시험에서 현기증 등이 보고됐지만 은폐됐다. 이윤 추구를 위해 의사의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게 했다. 당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신약의 약효를 연구한 학술논문을 제출하면 시판을 허용해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임신부에게는 입덧 예방과 임신 초기 불면증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광고했다. 독일을 비롯해 세계 46개국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 놀라운 약이 바로 탈리도마이드다.

그 후 1년, 독일에서 손과 발이 짧고 모양이 물개와 비슷한 기형아가 출산됐다. 당시 사람들은 방사선.피임약, 또는 살충제의 영향을 의심했다. 탈리도마이드가 심각한 신경마비 증상을 일으킨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회사는 이를 무시했다. 그러는 사이 탈리도마이드가 판매된 나라에서 갑자기 폭발적으로 사지기형의 신생아들이 속출했다. 61년 말 유전학 교수인 렌츠 박사에 의해 탈리도마이드가 기형아 탄생의 원인임이 밝혀졌고 판매가 전면 중단됐다. 그러나 이미 유럽에서만 1만 명이 넘는 기형아가 태어났고 수만 명의 환자들이 극심한 신경염으로 고통을 치른 뒤였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 대처방안의 차이로 명암이 갈렸다. 일본은 유럽 발매 2개월 만에 대일본제약이 무조건 수입해 수면제 및 위장약으로 판매했다. 약 1000명의 기형아가 태어나고 그 원인이 밝혀진 후에도 후생성과 제약회사의 대책이 늦어 피해가 증폭됐다. 미 식품의약국(FDA)에 갓 부임한 켈시 박사는 동물 실험 자료가 엉성한 것을 발견하고 미국 내 판매 승인을 거절했다. 켈시 박사는 미국을 구한 영웅으로 62년 말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인간의 태아는 수태된 지 두 달째 팔다리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하면 기형이 생긴다. 태아의 사지에 영양을 공급하는 핏줄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탈리도마이드 부작용이다.

악마의 약물이란 오명만을 남기고 사라졌던 이 약이 최근 무덤에서 부활했다. 강력한 항암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속속 발표됐기 때문이다. 부작용의 원인이었던 혈관 생성 억제 효과가 암세포를 굶겨 죽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98년 미국 FDA는 한센병 합병증 치료 및 다발성 골수종양 환자에게 제한적으로 사용을 승인했다. 피해자들의 착잡한 심정은 이해하지만 우수한 치료효과를 무시할 순 없었다. 현재는 죽음의 문턱에 있는 말기 암 환자로부터 에이즈 관련 궤양, 뇌종양, 피부 결핵 및 류머티스성 관절염 등 자가면역성 질환까지 치료영역을 넓히고 있다. 20세기 탕아가 21세기 들어 신이 내린 기적의 선물로 돌아온 것이다.

모든 약은 약효와 부작용이란 양면성을 갖는다. 문제는 정도의 차이다. 부작용 사례를 기업체가 묵살하지 않았거나 처방약으로 승인되었다면 그 많은 기형아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탈리도마이드 비극 후 약의 안전성 입증의 중요성과 윤리적인 책임이 강화됐다. 오늘날 제약산업이 건강하게 발전하는 계기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피해자들의 고통을 대신할 순 없다. 새삼 임신 중에는 나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먹지도 말라던 우리 선조들의 현명함이 가슴에 와 닿는다.

김성수 한국화학연구원 생명화학연구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