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정권의 오버, 우리의 오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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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지난 7일 자정(현지시간) 갑작스러운 폼페이오-김영철 회담 취소 발표는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뜨악했던 게 있다. 하루 전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의 브리핑이다.

헛바람만 불어넣은 ‘4개의 기둥’ 주장 #‘김정은’ 연호, 이렇게 오버해도 되나

김 대변인은 “미 국무부 보도자료에 나온 ‘4개의 기둥(four pillars)’이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는 싱가포르 공동선언의 네 가지 합의사항 중 3, 4번인 한반도 비핵화, 유해 발굴부터 이뤄져 왔지만 이번 회담에선 1번(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 2번(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 문제도 본격적으로 협상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새로운 접근법을 취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도 했다. 말인즉슨 미 국무부가 발표문에 ‘4개의 기둥’이란 표현을 쓴 것으로 미뤄 뭔가 협상의 판이 바뀔 것으로 보인다는 얘기였다. 김 대변인은 “최선희(북한 외무성 부상)가 참석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관측한다”는 말도 했다. 대다수 언론은 김 대변인의 말을 그대로 전하며 기대감을 높였다.

결과적으로 다 틀렸다. 물론 회담 취소는 어쩔 수 없었다. 청와대로서도 알 도리가 없었을 게다. 하지만 김 대변인이 ‘4개의 기둥’을 새로운 내용인 양 제시한 것은 명백한 곡해였다. 미 국무부는 이미 한 달 전인 지난달 9일 나워트 대변인이 브리핑에서 “폼페이오 장관은 (4차 방북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싱가포르 정상회담의 ‘4개의 기둥’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비건 대북특별대표도 지난달 8일 평양회담을 마치고 서울에 와 ‘4개의 기둥’을 언급했다.

한마디로 ‘4개의 기둥’이란 표현은 김 대변인의 부풀린 희망적 해석과는 달리 새로운 표현도, 새로운 의미도, 새로운 접근법도 아니었다. 검색만 하면 알 수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도 전후관계 파악도 안 된 채, 원칙론을 고수하는 워싱턴 분위기도 모르고 국민들에게 헛바람만 불어넣었다. 백번 양보해 ‘분위기 변화’를 감지했다 치자. 그렇더라도 북·미 간 문제를 사전에 청와대 대변인이 이렇다 저렇다 살을 붙여 언급할 일이 아니다. 이런 걸 오버라고 한다.

정치권은 한술 더 뜬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인 안민석 의원은 방탄소년단(BTS) 평양 공연을 추진하겠다고 했다가 “제발 건들지 말고 가만히 내버려 둬라”는 여론의 반발을 샀다. 본인이야 ‘민족적 과제’로 생각할지 모르나 글로벌하게 보면 ‘국가적 망신’이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에 BTS를 불러들이니 자신도 가능한 줄 안다. 그뿐인가. 국회에 나온 증인을 향해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라 불렀다. 증인이 이를 따지자 “국회를 모독하는 건가”라고 했다. 이런 오버를 지켜만 봐야 하나. 증인을 모독하고, 국회의 권위를 모독한 건 안 의원 쪽이다. 미국이나 일본 국회 같았으면 즉각 쫓겨났을 것이다.

집권당의 오버는 우리 사회의 오버를 초래하고 있다. 대낮에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김정은”을 연호하며 찬양하는 단체까지 나타났다. ‘백두칭송위원회’란다. 아무리 악법이라도 국가보안법은 현존하는 실정법이다. 남북대화와 김정은 찬양은 분명 다른 얘기다. 그런데 법을 집행해야 하는 경찰과 검찰은 애써 못 본 척한다.

도대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북한은 비핵화 레이스 출발점에서 아직 몸도 안 풀고 있는데, 우리는 이미 결승점에서 꽃다발, 금메달 들고 기쁨의 팡파르를 울리고 있는 것 아닌가. 청와대, 정치권, 우리 사회 모두 오버해선 안 되는 선이 있다. 그걸 자각하는 데에서 정상적 사고도, 정상적 행동도 나온다. 대한민국의 각성이 절실하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