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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Z] '성공 PD' 잭 웰치가 한국지사를 손꼽은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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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1976년 6월 30일 서울 소공동 대한항공 빌딩의 한 사무실. 열 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이 'GE인터내셔널'이란 간판을 내걸며 회사의 탄생을 자축했다. 세계 최대규모 기업인 GE(제너럴 일렉트릭)가 이제 막 중공업사업을 펼치려던 한국에 발전설비를 팔기 위해 국내 사업거점을 만든 순간이었다. 30년이 흐른 뒤, 작은 사무실은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14층짜리 'GE타워'로 모습을 바꿨다. 한개였던 국내 법인은 20여 개로, 직원은 1500여 명으로 각각 늘어났다. 연 200억원에 불과하던 국내 매출도 지난해 1조6000억원으로 불어났다.

26일엔 서울 신라호텔에서 제프리 이멜트 미국 본사 회장과 김종갑 산업자원부 차관 한준호 한국전력 사장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GE코리아 30주년 행사도 열었다.

조병렬 GE코리아 이사는 "GE코리아가 이렇게 성장한 것은 수많은 개발도상국 가운데 하나였던 한국에 과감히 투자한 GE의 판단과 한국 정부의 경제발전 열의가 맞아 떨어진 결과"라며 "본사도 한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글로벌 경영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와 동행=82년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국내 첫 정보통신 세미나에 참석한 수백 명의 프로그래머들의 눈이 둥그레졌다. 미국 GE 본사에 있는 컴퓨터와 국제전화로 연결된 PC 화면에 데이터가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GE가 KIST와 함께 연 이 시연회는 국내 정보기술과 네트워크 산업이 태동하는 계기가 됐다.

GE코리아의 역사는 한국 경제의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 73년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이 시작된 뒤 GE는 발전설비 등 사회간접자본 관련 제품을 미국에서 들여와 판매했다. 국내 산업의 틀이 잡히기 시작한 80년 전후론 기술 협력과 전략적 제휴를 본격화했다. 한국중공업과 발전설비 사업(78년), 삼성그룹과 항공기 제트엔진 사업(83년) 등을 함께했다.

84년엔 첫 합작업체인 GE삼성의료기기(현 GE헬스케어)를 설립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국내 가전회사들은 80년대 초반 GE에 주문자상표 부착생산(OEM)방식으로 가전제품을 공급하며 기술력을 쌓았다. 80년대 후반 자동차와 전자 산업이 커지면서 GE의 국내 사업도 확대됐다. 85년 66개 업종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 자유화되자 GE는 팔을 걷었다. 국내 처음으로 플라스틱 재질의 자동차 범퍼를 만든 GE플라스틱코리아(87년), 항공기 엔진을 정비하는 OWS코리아(2000년), 초음파 진단기기를 생산하는 GE초음파(2002년) 등을 잇따라 설립했다. 최근에는 금융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2004년 현대캐피탈 지분 43%를 사들인 데 이어 지난해에는 현대카드 지분 43%를 인수했다.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외국인의 금융업종 투자 제한을 풀기도 했지만 미국 본사가 금융업을 새로운 주력사업으로 키운다는 글로벌 전략에 따른 것이다.

◆GE글로벌 사업의 모델이 된 한국=80년대 후반 GE는 산업용 및 가전제품용 모터를 생산하는 2개의 합작법인을 각각 현대.대우그룹과 함께 설립했다. 전 세계 계열사에서 필요한 모터를 한국에서 만들어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시 가파르게 치솟던 인건비 때문에 생산비용 부담이 컸다. 당초 계산이 빗나가 2년 연속 적자가 났다. GE는 이 때 갖고 있던 지분을 모두 국내 합작선들에게 무상으로 넘겼다. '국제 가격대로 5년간 모터를 공급한다'는 조건만 붙였다. 강석진 전 GE코리아 회장은 "합작을 풀어 현대.대우그룹의 관련 계열사에 회사를 붙이니 임원 연봉 등 관리비 부담이 줄어 한국의 합작회사들도 좋아했고, GE는 지분을 포기하는 대신 안정적으로 제품을 공급받을 수 있어 이익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GE가 이런 결정을 한 것은 단기적 이익보다는 장기적 성장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창립 멤버인 강 전회장은 79년 '한국을 판매시장으로만 보지 말고 자본과 기술을 투자해 장기적 동반자로 키워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본사에 제출했다.

81년 새로 회장을 맡은 잭 웰치는 군말 없이 이 보고서 내용을 그대로 따랐다. 이후 GE의 국내 사업은 기술협력을 바탕으로 한 전략적 제휴, 국내외 시장 공동 진출 등의 방식으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요즘 GE가 전 세계에 판매하는 제트엔진용 터빈블레이드는 삼성테크윈에서 만든다. GE의 세계화 슬로건인 '한 나라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하는 회사(Company to Country Approach)'도 한국에서 태동했다. 취임 이후 매년 한국을 방문하며 GE코리아의 성공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웰치 전 회장이 90년 서울의 한 호텔에서 당시 한승수 산업자원부 장관과 조찬 회동을 한 뒤 떠올린 생각이라고 한다. 그는 한국 내에서의 사업 모델을 직접 차트로 만들어 최고위 임원들에게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

조 이사는 "지난 30년간의 협력 모델을 더욱 강화하고 GE의 경영 노하우를 한국에 계속 전수하는 등 세계 1위 글로벌 기업의 역할을 다할 것"고 밝혔다.

나현철.임장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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