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심으랄때가 언젠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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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고추사세요, 고추. 어젯밤 산지에서 올라온 겁니다』
23일 오전11시 농산물 제값 받기 위한 농민 고추장터가 열린 서울 명동성당 앞.
젊은 남녀들로 붐비는 휴일의 명동에서 흰 고무신에 허름한 작업복을 업은 농민 10여명이 고추를 사라고 목청을 돋우고 있었다.
『양담배수입 때문인지 정부에서는 올 봄 담배대신 고추를 많이 심으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와서는 과잉생산이라며 헐값으로 그것도 쥐꼬리만큼만 수매하겠다니 농민들은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경북 안동 등지에서 모은 고추를 트럭에 싣고 답답한 심정을 호소하러 서울에 왔다는 농민 김성현씨(34)일행.
행정당국 권고에 따라 고추를 집중적으로 심었다가 값이 폭락한데다 정부수매조차 안돼 살길이 막연해졌다는 농민들은 정부대책을 하소연했다.
이들은 경북 영양·봉화·안동 등지에서 잇달아 열린 「고추 값 보장하라」는 농민대회가 경찰과의 충돌로 구속자를 낳았을 뿐이라고 했다.
이날 김씨 일행은 농산물 제값 받기 농민투쟁지원대책위의 지원을 받아 서울 4곳에서 고추장터를 열고 서울한복판에서 궐기대회도 가질 예정이었으나 도시민의 냉담한 반응으로 시름만 더욱 깊어졌다.
이날 5천근의 고추를 준비한 김씨 등이 시중보다 5백∼6백원 싼 가격으로 하루종일 판 고추는 겨우 6백여근.
『이게 어디 농민만의 문제입니까. 농촌이 망하고도 도시가 살수 있겠읍니까』
『그래도 고추 싣고 서울로 올라 올 때는 기대가 컸었는데… 』 팔다 남은 고추를 챙기는 이들의 지친 뒷모습에서 농산물수입개방에 처한 농촌의 힘겨운 현실을 보는 듯했다.<유상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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