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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벌주의의 역기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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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정감사가 시작되면서 국민들은 올림픽으로 만끽했던 성취감을 박탈당해 가는 느낌이다. 곳곳에서 손만 대면 쏟아지는 구조적 부조리에 많은 사람들은 무력감마저 느껴야 했다.
이른바 5공 비리. 누구의 말처럼 존재해서도, 태어나서도 안될 정권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 5공 정권의 존재 상실과 탄생 과정 하나하나는 분명 올림픽을 치러낸 국민들을 슬프게 하고 있다.
유혈참극으로 9일만에 끝난 12인의 탈주사건도 따지고 보면 정권이나 정치의 왜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막다른 골목으로 쫓긴 마지막 도망자들이 내뱉은 말은 무전유죄 유전무죄-. 살인범도 풀어주면서 우리만 왜 못살게 하느냐는 절규는 그것이 죄수의 말이라 하더라도 우리사회의 법 집행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돼야함은 분명하다.
그들은 안암동·행당동·문정동·창천동을 거쳐 북가좌동에서 최후를 마칠 때까지 우리의 행형정책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죄에 비해 형량이 너무 많아 탈주를 결심했다. 판결 후 자살하려고도 했다』고 했고 『형량이 사람에 따라 고르지 않다. 지금 나이 22세인데 보호감호까지 살고 나면 50이 된다. 교도소서 늙어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마찬가지』라며 이판사판의 심경을 토로했다.
지나친 장기수형에 대한 절망감이 결국 이들을 이판사판으로 몰아붙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르지 못한 형량에의 불만과 함께 죽음까지 각오했던 이들의 장기수형에 대한 거부의 몸짓에서 형사정책 내지 교정정책이 어딘가 잘못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범죄예방에 형사정책의 목표가 있고 범죄자를 정상인으로 바로잡아 사회에 되돌려보내는 것이 교정행정이라면 범죄인을 승복시키지 못하는 중형과 반성보다는 반발을 부르는 징벌위주 교정행정은 재검토돼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제5공화국형의 중벌주의 형사정책을 돌아보게 된다. 제5공화국은 80년 12월 국가보위 입법회의를 통해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면서 형사피의자의 체벌형량을 대폭 강화하는 특별법을 양산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특가법)·사회보호법 등이 개혁입법으로 급조됐고, 집시법·보건범죄단속 특별조치법 등의 법정형량을 크게 늘렸다. 특히 특가법은 17개 조문 가운데 상습강도·유괴·고액밀수·뇌물수수·관세포탈 등을 규정한 12개 조문은 사형까지를 허용하는 무서운 법이다. 그래서 법조계에서는 「죽음문서」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물론 이 같은 범죄가 응징돼야 한다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형까지를 허용하는 중벌주의가 이들 범죄의 예방에 도움이 되는지의 여부는 또 다른 문제다. 총알이 떨어져 자살에 실패하고 진압경찰에 의해 사살된 이번 탈주사건 주범 지강헌이 죽음을 자초하면서 최후순간까지 자수를 거부한데서 우리는 그런 의문을 더욱 강하게 갖게 된다.
상습강도 혐의로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은 그의 나이는 35세였고, 탈주에 대한 처벌이 병과되면 평생 교도소를 나오기 어렵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없었던 셈이다. 보호감호에도 2년마다 한번씩 가출소 심사대상이 되는 기회가 없진 않지만, 경험자들에 따르면 기간 내에 풀려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다.
그뿐 아니다. 시국사범을 주로 다루는 집시법 또한 최고형을 5년 징역에서 7년 징역으로 늘리는 등 형량의 인플레를 빚었다. 그러면서도 중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은 5공 이후 재범률이 오히려 크게 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게 된다. 검찰의 조사에 따르면 5공 출범전인 80년의 14.4%가 87년에는 26.5%로 늘었다. 중벌주의가, 그것도 실질적인 교정기능을 다하지 못한 형벌만능주의가 죄의식 마비현상을 불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나아가 중벌만능주의는 잡히면 인생은 끝장이란 심리상태를 강요한다. 물론 그것이 범죄예방기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범죄상태가 된 범인은 그 때문에 흉악범으로 변한다는 분석도 일리가 있다. 강도가 가정 파괴범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80년 이후 점차 늘어가는 원인의 상당부분이 여기서 나온다는 것이다.
5공 이후 많은 판사들은 이 같은 법으로 양형에서 행사할 수 있는 재량권을 박탈당한 채 가슴앓이를 해왔다고 들린다. 법원은 공포정치의 시녀가 되고 사법부는 이 때문에도 더욱 왜소화됐다는 얘기다. 특별법의 남발로 형사범은 대부분 특별법에 의해 처벌되면서 본래의 기본법은 예외로 받아들여지는 풍토가 됐다.
재야법조계에서 특가법을 5공 비리로 규정하고 이의 개폐를 주장하는 움직임도 그런 맥락에서 타당성을 갖는다. 근원적인 재검토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이번 탈주사건은 가르쳐줬다.
그밖에도 이번 사건은 수도치안을 맡고있는 경찰의 한심한 대처능력과 엄청난 징벌을 해대면서도 정작 필요할 때는 계호수칙 조차 지키지 못한 교도관들의 근무태세의 재점검을 요구한다.
무엇보다 이번 사건은 교도소를 경험한 이들이 교도소에 다시 들어가기보다는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필사의 도주를 하도록 만든 교도행정 전반에 대한 재검토의 계기가 돼야할 것이다.
권순용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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