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인 108명 그들의 '끼' 담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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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사진작가 이은주(56)씨는 올 한가위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무대 앞 뒤에서 보냈다. 춤꾼.배우.음악가들 사이를 누비는 동안 보름달은 뜨고 졌다. 해가 바뀌는 연말연시도 추석과 비슷하다. 사진기를 잡은 뒤로 명절은 그에게 연휴가 아니라 오히려 일복이 터지는 때다.

지난 30여년간 공연예술인들의 모습을 기록해온 李씨는 "마음으로 미치게 좋아하지 않았다면 일찌감치 때려치웠을 일"이라고 했다.

"1986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 공연을 처음 봤어요. 당시에는 우리가 러시아를 소련이라 부르며 적으로 간주하던 땝니다. 보기 힘든 무대라 가슴이 북소리가 날 정도로 뛰었어요. 너무 흥분한 제가 촬영이 안 된다는 방송을 듣고도 참지 못해 무의식적으로 카메라를 들었나봐요. 안내인이 쫓아와 필름을 빼앗았는데, 얼마나 찍고 싶었는지 어둠 속에서 비상용으로 갖고 있던 또 한 대의 카메라를 꺼냈어요. 무대만 보면 피가 끓는 게 제 재산이자 밑천인 셈입니다."

오는 23일부터 28일까지 서울 태평로 서울갤러리에서 열리는'이은주가 만난 108 문화예술인'은 그가 80년부터 2003년까지 만나 찍은 1백8명의 예술인을 불러모은 사진전이다.

'동양의 마녀'라 불리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씨로부터 칠순인 지금도 소녀 같은 연극배우 백성희씨까지 '끼'가 넘치는 예술인들이 李씨 카메라 앞에서 그들만의 얼굴을 드러냈다.

"'허튼 춤'으로 일가를 이룬 한국무용가 정재만씨 사진은 20년 전에 찍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번 전시회를 알리는 전화를 하며 이렇게 말했죠. '잃어버린 청춘을 찾아줄게 꼭 와봐요. 세월을 돌려준다니까.'"

그는 일하며 만났던 수천명의 예술인 속에서 "인생을 보고 삶을 닦아왔다"고 말했다. 이젠 낯빛만 보면 '저 이가 욕심이 많은지, 예술혼이 풀리는지'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이 됐단다. 문의 02-2000-9736.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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