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너무 가혹" 위헌 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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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특정 범죄를 무겁게 처벌하도록 하기 위해 만든 특별법들의 타당성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시대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있거나, 죄질의 경중 등을 고려하지 않고 이른바 '일벌백계' 시각에서 가혹한 처벌을 규정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금융기관 임직원과 변호사가 직무와 관련해 부정한 돈을 받았을 경우 각각 다른 처벌을 받는다.

금융기관 임직원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경가법) 제5조 제4항에 따라 5000만원 이상을 받았을 경우 최고 무기징역에 처할 수 있다. 이 법은 1980년대 초반 장영자씨 등이 주도한 어음 사기 등으로 은행권 등 금융계 인사들에 대한 처벌 여론이 높아지면서 마련됐다.

그러나 변호사의 경우 형법상 배임수재죄로 처벌받는다. 이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변호사의 사회적 책임이 결코 금융기관 임직원보다 작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형평성 논란이 제기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특경가법 제5조 제4항에 대해 "평등원칙에 위반되고, 지나치게 가혹하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고 30일 밝혔다. 재판부는 "금융기관 임직원의 수재죄를 수수 금액에 따라 엄하게 가중 처벌하는 입법 사례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올 2월 부정대출 대가로 9000여만원을 받은 금융기관 직원의 사건을 심리하다 이 법 조항의 위헌 여부를 가려 달라고 헌법재판소에 제청했다.

◆ "무조건 중형 처벌"=특경가법과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가법)은 돈을 받은 액수, 회사나 타인에게 끼친 손실액에 따라 가중 처벌하고 있다. 두 법률이 비판받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물가상승 등 경제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경가법 제5조 제4항의 경우 1990년 이후 개정되지 않았다. 정상진 변호사는 "16년 동안 조항을 그대로 유지한 것은 입법기관이 게을렀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둘째, 형벌이 죄질에 상응해야 한다는 비례성의 원칙에 반한다는 것이다. 김명식 변호사는 "돈을 받은 경위나 사정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중형을 선고토록 하면 법에 대한 권위가 무너진다"고 지적했다.

◆ "형량 인플레 심각"='형량 인플레' 문제도 심각하다. 이는 특정 범죄에 대한 처벌 여론이 높아질 때마다 높은 법정형을 특별법에 끼워넣었기 때문이다. 판사들이 관행적으로 형을 절반으로 깎아줬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형법(제53조 등)은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을 때 절반까지 형량을 줄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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