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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 사기·뇌물, 오해일 뿐이랍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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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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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사기는 남을 속여 그로부터 뭔가 경제적 이득을 취해야 하는데요, 뭘 편취했다고 봐야 할지가 애매하죠.

엄단 운운해도 사법 처리에 한계 #공정성 보장장치 마련이 더 중요

나: ‘열린 채용’이라고 홍보하며 지원자를 늘려 기관이나 회사가 더 인기가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 것은 이득으로 볼 수 없나요?

검사: 속은 사람의 물건 또는 돈이 속인 쪽으로 옮겨 가야 해요. 법이 그렇게 돼 있어요.

나: 지원자의 시간과 노력이 기관이나 회사의 이미지 제고라는 이득으로 전환됐다고 볼 수도….

검사: 지원서 작성과 면접에 쓴 시간을 기회비용으로 계산하면 몇 만원 수준일 텐데 그걸 사기 피해로 규정해 기소하면 오히려 봐주기 수사라고 욕먹지 않겠어요?

나: 그러면 채용 비리는 무슨 죄가 되죠?

검사: 일단 업무방해라고 볼 수 있죠. 실제로 대부분 그 혐의로 기소합니다.

나: 누가 누구의 업무를 방해했다는 거죠?

검사: 회사나 기관의 고위직 인사가 채용 담당자나 면접위원의 업무를 방해한 것이죠.

나: 피해자가 취업준비생이 아니라 회사 인사 담당자가 되는 좀 이상한 구조네요. 회사 상관이 부하 일을 방해했다고 검찰이 혼내 주는 것도 억지스러워 보이고요.

검사: 다소 고민스러운 부분이긴 합니다.

찜찜한 기분을 가라앉히고 다른 검사에게 다시 물었다. 채용 비리 수사에서 왜 뇌물죄는 안 나오느냐고. 돈 받고 채용해 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고위 공직자 친인척이나 국회의원 보좌관을 채용한 것이 뇌물을 바친 것으로 볼 수 없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런 부분도 들여다보고 있으나 ‘제3자 뇌물’은 뇌물을 준 사람이 ‘부정한 청탁’을 했음이 입증돼야 하므로 현실적으로 규명하기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특혜 채용을 시켜 준 측에서 그 대가로 고위 공직자나 국회의원에게 부당한 일을 부탁했다는 게 드러나야 하는데 그런 사례는 나오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서 보듯 제3자(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닌 최순실·정유라씨)가 수혜자인 구조의 뇌물 혐의는 검찰이 실제로 청탁이 있었음을 명확히 입증하지 못하면 법원에서 인정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현행법 테두리 안에서 채용 비리는 사기나 뇌물이 되기는 어렵고, 고작 업무방해 정도가 된다는 얘기다. ‘고작’이라 함은 우선 업무방해는 대개 많아야 벌금 1000만원이나 집행유예 징역형이 나오는 죄이기 때문이다. 윗사람이 넌지시 얘기한 것을 ‘방해로 볼 수 없다’며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하여 사회 정의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만행이라며 청와대·국회·언론 등에서 표출한 분노에 걸맞지 않은 ‘단죄’의 결과가 나올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해 국회의원들이 채용 비리를 겨냥한 법안을 내놓았다. 의원 18명이 발의한 ‘학력·출신학교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안’이 그것이다. 하지만 1년5개월이 지나도록 법안심사소위도 통과하지 못했다. 민간 기업 지원서에서도 출신학교를 적는 칸을 없애 버리도록 하는 조항 때문에 갑론을박만 오갔다.

그러니 이제 좀 솔직해지자. 다섯 개 이상의 검찰청이 압수수색과 소환을 이어 가며 정의 구현에 매진하고 있지만 이 사태의 결말은 허무할 수밖에 없다. 취업준비생들에게 응징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기는커녕 배신감만 안길 공산이 크다. 민간 영역인 은행을 공기업처럼 다루는 것에 법원이 제동을 걸 수도 있다. 되지도 않을 ‘강력한 처벌’ 운운하며 청년들을 현혹하지 말자. 그럴 시간에 머리를 맞대고 공채의 투명성을 높이는 제도적 장치를 찾자. 큰불 났다고 건물 관리인을 잡아 가둬 봤자다. 지금의 야단법석은 또 한 번의 ‘희망 사기’다.

이상언 논설위원